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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안드레이 란코프]북한 부정부패의 두 얼굴

입력 | 2014-09-05 03:00:00

1990년대 국영경제 붕괴후 굶주린 주민들 불법장사로 연명
배급 끊긴 간부는 뇌물받아 생활
수많은 餓死 위기 주민 살리고 ‘식물경제’ 다시 성장시킨 市場化
부정부패 없었다면 불가능
그러나 북한 살린 부정부패가 이젠 경제개혁 가로막는 암초로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andreilankov@gmail.com

나는 얼마 전 탈북 여성과 만나 북한 사정에 관해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북한의 시장에서 중국산 신발을 팔던 그 여성이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동할 때마다 뇌물을 줘야만 여행증이 곧바로 나왔다. 필자는 만약 뇌물을 받지 않는 경찰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 여성은 놀라며 “북한에서 뇌물을 받지 않는 간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했다.

북한 주민은 간부라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부정부패는 단기적으로 볼 때 북한 경제의 ‘필요악’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부정부패는 분명히 사회 발전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김일성 시대의 북한에는 뇌물 문화가 거의 없었다. 스탈린식 경제에서는 돈의 힘이 별로 없었다. 1960년대 초부터 곡식을 비롯한 기본 식품과 소비재는 국가에서 주민에게 배급을 해줬기 때문에 개인은 돈이 있어도 소용이 거의 없었다. 돈으로 자동차나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냉장고나 텔레비전 같은 값비싼 인기 소비품도 돈으로 얻기가 어려웠다. 김일성 시대의 북한에서는 힘의 기원이 돈보다 행정권력이었다. 당시 북한 가정에서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같은 소비 물자는 설사 부잣집이라 해도 돈으로 장마당에서 살 수 없었고, 간부들이 ‘수령님께서 주신 선물’로 받는 게 고작이었다. 당시 야심이 많은 북한 간부들은 뇌물을 요구하는 것보다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승진을 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간 다음 더 유복한 소비생활을 이루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됐다. 1990년대 이후 북한 정권이 주체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북한의 경제생활은 자생적 시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영 경제가 무너진 다음 북한 주민은 자본주의를 재발견했다.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는 자, 중국과 밀무역을 하는 자, 고기를 잡아 바다에서 일본 어부들에게 팔아넘긴 자 등 각양각색의 장사꾼들이 생겼고 돈을 엄청 많이 벌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국내로 흘러들어오는 소비 물자도 돈만 있으면 장마당에서 누구든지 살 수 있게 됐다.

반대로 국가는 자원이 없어져서 서민에게 옥수수 배급마저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하급 간부들에게도 줄 게 거의 없었다. 당과 장군님만 믿고 규칙을 잘 지키고 부정부패를 싫어하는 간부들은 고난의 행군 때 서민만큼 고생이 많았다. 결국 굶어 죽지 않으려면 생각을 바꿔야 했고 뇌물을 받기 시작했다.

뇌물을 요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정일,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사실상 시장경제가 됐지만 정치적 고려 때문에 정권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서 개인 경제 활동을 거의 금지하는 법을 풀지 않고 있다. 결국 북한 신흥 부자들은 거의 빠짐없이 불법행위를 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간부들은 장사 같은 활동을 못 본 척하며 그 대가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북한의 부정부패가 곤경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간부들은 뇌물을 받고 ‘장사’로 알려진 개인 경제 활동을 보고도 못 본 척하기만 하면 된다. 법에 따라 단속을 했더라면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은 민중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북한 경제가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 말 이후 북한 민중이 생계를 꾸리고 북한 경제가 다시 성장하게 된 기본적 동인이 시장화다. 북한 정권이 이 경제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시장화는 부정부패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부정부패를 환영할 수만은 없다. 한편으로는 부정부패가 북한 경제 개혁의 길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 정권이 중국 공산당처럼 개인 경제, 시장경제를 허용한다면 뇌물로 살아가는 간부들은 살길이 없어질 것이다.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나 마찬가지다. 이들이 시장경제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이 조만간 바뀌기 시작할 때 습관화된 부정부패는 문제가 될 것이다. 권력이 있는 자가 뇌물을 요청하는 것이 북한에선 상식이 돼버렸다. 체제가 완전히 바뀌어도 부정부패를 당연한 것으로 보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andreilankov@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