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뉴욕 움직인 두 청년의 무한도전

입력 | 2014-03-22 03:00:00

◇하이라인 스토리/조슈아 데이비드, 로버트 해먼드 지음·정지호 옮김/376쪽·2만5000원·푸른숲




미국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된 하이라인 공원. 책의 뒷부분 200쪽 분량은 하이라인 화보집이다. 육류 우유 농산물을 실어 나르며 ‘뉴욕의 생명선’ 역할을 하던 시절의 흑백 사진부터, 하이라인 재활용을 위한 공모전에 출품됐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그림, 공원 조성 공사 과정과 완공 후 사람들이 공원을 활용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이 담겨 있다. 건축전문 사진작가 이완 반 제공

하이라인은 1934년 미국 뉴욕 맨해튼을 관통해 지상 9m 높이에 건설된 열차 선로다. 1980년 운행이 중단된 채 도심의 흉물로 버려진 이곳은 2009년 1.6km 길이의 하늘공원으로 변신해 매년 200만 명을 끌어 모으는 뉴욕의 명물이 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 대형 프로젝트가 뉴욕시장이나 주지사의 선거 공약으로 추진된 사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이라인은 고가 선로가 철거되길 원하지 않았던 평범한 게이 청년 두 사람의 의기투합에서 시작된 풀뿌리 프로젝트다.

프리랜서 작가이던 조슈아 데이비드. 첼시로 이사와 기삿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그의 눈에 하이라인이 들어왔다. 하이라인에 올라가는 건 금지돼 있는 상황에서 ‘대형 고가 선로가 22개 블록에 걸쳐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얘기는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우리와 다른 시대의 산업 유산 위에 올라서서 거닐어보는 것은 근사하지 않을까.’

1999년 8월 뉴욕시는 철도 주변 땅 소유자들의 철거 요구를 받아들여 주민 공청회를 열었다. 사람들은 이 동네에 한때 열차가 다녔다는 사실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선로 아래는 시끄럽고 더러웠다. 선로의 강철 들보 사이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비둘기 똥도 불만거리였다. 데이비드는 그곳에서 하이라인 보존에 관심이 있는 유일한 참가자였던 컨설턴트 로버트 해먼드를 만났다. 둘은 “네가 한다면 나도 거들게”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이라인 보존 운동을 시작했다.

이 책은 데이비드와 해먼드 두 청년이 시민단체 ‘하이라인 친구들’을 만들어 하이라인 공원화를 이뤄내기까지 10년간의 기록이다. 이들은 고가 철로 보존을 위해 필요한 전문지식이 전무했다. 하지만 두 청년의 활약상은 시민운동의 모범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다. 하이라인 보존을 지지해줄 사람들을 하나둘 모으고, 보존에 반대하는 이들과 밤새워 토론했다. 뉴욕시장 선거 후보들이 나오는 모임에 가서는 “하이라인 보존 노력에 협조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고, 뉴욕시의 하이라인 철거 결정을 무효화하기 위한 소송비용을 포함해 막대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수시로 모금 행사를 열었다. 공원화로 인한 경제적 효과가 조성비용을 웃돈다는 데이터로 뉴욕시 공무원의 지지를 얻어내고, 공원화에 반대하는 부동산 지주들은 다른 지역의 개발권을 보장하는 묘수를 제시해 설득했다.

가장 중요한 건 여론전이었다. 20년째 버려진 채 야생화 천지를 이룬 하이라인의 독특한 사계절을 솜씨 좋은 사진작가에게 찍게 했다. 이 사진은 홍보 책자로 출간되고, 각종 기금 모금 행사에 경매품으로 나와 인기를 끌었다. 하이라인을 어떻게 재활용하면 좋을지 공모전도 열었다. 36개국에서 720점의 설계안이 도착했는데 하이라인 전체 구간을 수영장으로 만들자, 선로에 롤러코스터를 설치하자, 교도소를 만들자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시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2001년 9·11테러는 고가 철로 보존 여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사람들은 뉴욕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 했다. 하이라인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뛰어들기에 적당한, 정서적으로도 무겁지 않은 일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2009년 6월 하이라인 공원의 일부를 개장했다. 기존 노반을 활용해 선로를 깔고, 이곳에서 자라던 야생식물 씨앗을 거두었다 그대로 심어 조성한 공원엔 2년간 40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설치미술을 감상하고, 요가를 하고, 나무 덱에 누워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매년 300일 이상은 시민 행사가 잡혀 있다. 프랭크 게리, 장 누벨, 시게루 반 등 뜨르르한 건축가들이 앞다퉈 주변에 건물을 설계했고, 하이라인과의 근접성은 아파트 분양의 짭짤한 홍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어떤 이는 공원을 도시로부터의 탈출구로 여기지만 하이라인은 뉴욕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자동차 경적음을 들을 수 있고 지나가는 차와 택시를 볼 수 있다. … 그리고 혼자만이 아니다. 다른 뉴요커들과 함께 하이라인을 걷고 있다.”

하이라인이 부러운 건 그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공원이 멋있어서가 아니다. 하이라인이 고가 철로 공원화의 첫 사례도 아니다. 정말 놀라운 건 도시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사회 시스템이다. 공공시설물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진 시민들, 목청껏 피켓 시위를 벌이는 대신 다양한 의견수렴의 기회를 활용하는 시민단체, 법규와 전례에 숨지 않고 시민들의 합리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공무원, 정부 기금을 내주었다며 생색내기는커녕 ‘관보다 잘할 테니 민간이 하라’며 운영권을 넘겨주는 정부. 하이라인 공원화를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을 동원하면서 재능기부를 요구하지 않고 열심히 기금을 모아 제 값을 주는 문화도 인상적이다.

각자가 제 몫을 다해 이뤄낸 이 도시 재생 프로젝트는 누가 읽더라도 커다란 울림을 줄 것이다. 특히 때마다 욕먹어 가면서도 기어이 선진국 시찰을 떠나고야 마는 의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시민들의 작은 바람을 어떻게 크게 키워내 살 만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지에 관한 깨알 같은 조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