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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숨겨진 이야기들

입력 | 2014-01-03 03:00:00

숭릉… 땅속에 묻힌 석상 첫 재활용
목릉… 1정자각 - 3봉분 배치 ‘특이’




경기 구리시에 있는 목릉. 조선에서 유일한 동원삼강릉으로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인목왕후릉과 선조릉, 의인왕후릉이 조성돼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에 있는 동구릉(사적 제193호)에는 9능 17위, 즉 9명의 왕·왕비와 17명의 후비가 안장돼 있다. 이 가운데 숭릉(崇陵)은 조선 제18대 왕 현종(1641∼1674)과 비 명성왕후(1642∼1683)의 능을 일컫는다. 특히 이곳 정자각은 조선 왕릉에서 유일하게 팔작지붕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2011년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됐다.

능침 주위 유물도 빼어나다. 문석인(文石人)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고, 무석인(武石人)은 절도가 넘친다. 망주석(望柱石·무덤 장식 돌기둥)과 석양, 장명등(長明燈)도 훌륭하다. 그런데 이 석물들 상당수가 ‘재활용’된 것이란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달 발간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보고서’ 4, 5권에 따르면 숙종은 1674년 숭릉을 조성하며 어머니 명성왕후의 뜻을 받들어 효종(1619∼1659)의 옛 영릉(寧陵) 터에 있던 석물을 재사용하도록 명했다. 원래 영릉은 동구릉 내 건원릉(健元陵·태조의 능) 서쪽에 있다가 1673년 현재의 경기 여주시로 옮겨진 상태였다. 당시는 천릉한 영릉에 다시 효종의 비 인선왕후(1618∼1674) 능을 조성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시점. 재활용은 ‘백성들이 너무 곤궁해지니 재정 지출을 줄인다’는 의도였다. 옛 영릉에 썼던 석물은 이미 땅 속에 파묻힌 상태였으나 이를 꺼내 개보수해서 사용했다.

숭릉에 있는 무석인. 옛 영릉에 있던 석물이나 숭릉을 조성하며 재사용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재활용 선례가 생기자 이후 다른 여러 왕릉도 이를 따랐다. 1731년 장릉(長陵)을 옮기거나 1856년 인릉(仁陵)과 1864년 예릉(睿陵)을 조성할 때도 옛 석물을 사용했다. 연구소의 황정연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는 “왕릉 규정은 조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벌어지는 대상이라 쉽게 바꿀 수 없다”며 “백성을 걱정한 왕실의 마음이 석물 재활용이란 독특한 전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동구릉 안에 있는 목릉(穆陵)은 독특한 배치로 눈길을 끈다. 목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유일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이웃한 세 언덕에 왕릉이 만들어졌다. 선조(1552∼1608)와 정비 의인왕후(1555∼1600), 계비 인목왕후(1584∼1632)가 함께 모셔졌다.

마찬가지로 선례가 없던 왕과 왕비 2명의 능이 한 곳에 조성된 까닭이 뭘까. 한마디로 선조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왕릉 옆에 어느 왕비 혹은 후비가 안장되는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다. 당대 세력의 역학관계가 작용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선조는 쉰 살 나이의 자신에게 열여덟 나이로 시집온 인목왕후를 아끼는 마음에 교묘한 정치력으로 이를 관철시켰다.

목릉은 역사적 상징성도 크다. 의인왕후가 승하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여서 국가 운영에 여력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이전 상·장례를 참고할 의궤를 전부 소실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 실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1601년 편찬한 ‘(의인왕후)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는 능 조성 의식 절차를 담은 현존 의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여주시로 천릉한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도 독특한 배치로는 빠지지 않는다. 조선 유일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양옆이 아니라 위아래로 배치됐단 뜻이다. 황 학예사는 “효종 옆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혈(穴)이 너무 나빠 격론 끝에 이런 독특한 구조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는 2006년 시작돼 2009년 첫 보고서를 내놓았다. 2015년까지 8권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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