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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남북정상 대화 금고용 보물 아니다

입력 | 2013-06-29 03:00:00


방형남 논설위원

정보가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맞서면 어떻게 될까.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이 그런 상황을 실제로 연출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화 도중 김정일에게 “그러면 남측 방문은 언제 해주실랍니까”라고 물었다.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6·15공동선언에 들어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대목을 근거로 한 질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꼼짝 못할 공격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화살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정일은 말했다. “그건 원래 김대중 대통령하고 얘기했는데, 앞으로 가는 경우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서 갈 수 있다. 군사적 문제가 이야기될 때는 내가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가 돼 있습니다.” 예상 밖의 답변에 놀란 노 전 대통령은 “아 그렇게…”라며 말을 더듬었다. 드라마 대본이었다면 ‘몹시 당황하며’ 정도의 지문이 들어갔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우리는 전부 김정일 위원장께서 방문하시기로 약속한 것으로, 우리 국민들은 전부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며 물러섰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 딴 이야기를 하고도 공동선언을 ‘답방 합의’로 포장해 발표한 것이다. DJ는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 전 대통령에게도 1차 남북 정상회담의 핵심 중 핵심을 털어놓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DJ에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줄기차게 6·15공동선언 실천을 요구하며 남한을 압박할 때 ‘김정일부터 서울 답방 약속을 지켜라’라는 요구는 보수 진영의 효과적인 반격수단이었다. 김정일 본인이 서명해 놓고 어기고 있는 것 중에서 이처럼 확실한 약속 위반도 없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남한의 역공에 쥐뿔도 모르면서 떠든다며 코웃음을 쳤지 싶다.

DJ의 이중행보는 국민을 속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황당한 경험을 국민에게 숨겼다. 2차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국민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2차 정상회담에서 발생한 또 다른 재앙은 김계관의 보고에 대한 대응이다. 김계관은 노 전 대통령에게 6자회담 참가국들의 10·3합의 내용을 설명하며 핵물질 신고에 대해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미 만들거나 개발한 핵무기는 숨기겠다고 우리 대통령에게 통고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게 북핵 폐기 의지가 있다면 당연히 이의를 제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수고하셨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다”며 김계관을 칭찬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한 셈이다. 이런 일이 6년이 지나서야 국민에게 알려졌다.

북한은 종신독재체제이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은 통상적인 정상회담과 다르다. 올해 29세인 김정은은 변고가 생기지 않으면 죽는 날까지 집권할 수 있다. 1, 2차 남북정상회담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김정일처럼 김정은도 관련 정보를 빠짐없이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인수인계가 확실하게 되지 않으면 누가 되더라도 우리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처럼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다.

정보 불균형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남북접촉 관련 기록은 특정 대통령이나 정부의 전유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최소한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들은 현직 대통령이 언제든지 꺼내 대북전략 수립에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기록물은 최대 30년의 보호기간을 정해 열람 사본제작 자료 제출을 피할 수 있다. 비밀로 해야 할 기록물이 있기는 하지만 남북정상이 나눈 대화록은 대통령기록관 금고에 꽁꽁 숨길 보물은 아니다. 남북정상 대화를 감추면 나라를 망친다는 사실을 이번 대화록 공개가 보여주지 않았는가.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