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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섭다” 은둔생활… “또 당할라” 전학 가도 외톨이

입력 | 2013-03-15 03:00:00

학교폭력 피해자 내팽개치는 사회… 가해자에겐 한없이 너그러워




차관들 폭력근절 대책 회의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 차관 회의가 열렸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11층 회의실에서 김동연 국무총리실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교육과학기술부, 경찰, 검찰 등 관련 부처 차관급 관료들과 함께 토론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아버지가 “○○야”라고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열자 이모 군(15)은 후다닥 책상 아래로 숨었다. 늘 있는 일인 듯 아버지는 태연하게 책상 아래로 몸을 숙여 아들과 눈을 맞췄다. “괜찮아, 아빠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 군은 아버지를 향해 두 눈만 껌뻑였다. 이 군은 아버지가 방을 나갈 때까지 책상에서 나오지 않았다. 얼마 뒤 방 안에선 게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종일 틀어박혀 인터넷 게임을 하는 게 일상의 전부다. 13일 서울 마포구의 집에서 만난 이 군 아버지는 “경산에서 한 아이가 또 자살했다던데 우리 애는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 ‘죽기 아니면 외톨이 되기’

이 군은 서울 강서구의 한 중학교에 입학한 2011년부터 1년간 같은 반 학생 6명에게 폭행당했다. 6명은 머리 목 가슴 배 성기 등 여섯 부위를 한 곳씩 맡아 때렸다. 그중 1명은 이 군을 빈집으로 불러 음란 동영상을 보여주며 성추행했다. 이 군은 1년 가까이 혼자 앓았다. 이 군이 공사장에서 집단 폭행당하는 광경을 우연히 본 학교 선배가 부모에게 알리면서 죽음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던 이 군의 피해가 드러났다.

그 후 1년이 지났지만 이 군의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가해 학생들이 학교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2012년 3월 다른 구의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새 학교에서도 ‘투명인간’으로 지낸다. 초등학생 땐 학생회 간부를 여러 번 할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는데 요즘은 남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이 군을 상담한 의사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느껴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아야 안심하는 것”이라며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져 관심을 받는 것 자체를 포기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 군이 집에서마저 숨바꼭질을 벌이며 ‘은둔형 외톨이’로 사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몸은 나아도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아물지 않은 것이다.

이 군 가족은 상담치료비를 대느라 빚더미에 앉았다. 정신과 상담은 건강보험 적용이 안 돼 시간당 10만 원가량 든다. 피해 학생 치료를 지원하는 학교안전공제회의 도움을 받으려 했지만 절차가 복잡해 한 번밖에 이용하지 못했다.

○ 가해자 처벌 결과 피해자는 몰라

이 군은 요즘 울면서 잠에서 깨는 일이 잦다. 학교폭력 사건으로 법정에 섰던 악몽을 자주 꾼다. 당시 가해 학생 측 변호사는 이 군에게 수학여행 때 가해자들과 찍은 사진과 가해자들이 과자를 먹여주는 사진을 내보이며 “이렇게 웃으며 어울리는데 괴롭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 군은 그 사진을 찍던 날 밤에도 화장실에서 30분 넘게 구타당했고, 과자 역시 ‘남은 것을 처리하겠다’며 억지로 퍼 먹인 것이었다.

기자가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내내 말이 없던 이 군은 당시 재판 얘기가 나오자 “저를 괴롭힌 애들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 몰라 너무 억울하다. 죽어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재판은 지난해 9월 끝났지만 이 군은 가해자들이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서울가정법원과 학교 측에 여러 차례 결과를 문의했지만 “청소년 신상 정보는 알릴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현행 소년법은 가해 청소년의 재판 결과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원 관계자는 “가해자에 대한 교화가 우선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교폭력 사건은 일반 소년 사건과 달리 피해기간이 길고 가해 학생과 같은 공간에서 지낼 가능성이 높아 처벌 결과가 통보되지 않으면 피해자의 불안감을 키우고 상처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공권력을 통한 ‘화풀이’ 과정이 있어야 마음속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는데 처벌 결과를 알지 못하면 응어리진 상태가 지속돼 새롭게 삶을 시작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이 군과 가족은 법정에 섰던 가해자 6명 중 3명이 무죄로 풀려나고 나머지에겐 보호처분 등 가벼운 조치가 내려졌다는 ‘소문’만 들은 상태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도 가해자 1명에게만 일주일 출석정지 처분을 내리고 나머지는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 지난해 전국의 학교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학교 측 처분 결과를 보면 전학(5.2%) 퇴학(0.3%) 등 중징계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특별교육 또는 교내봉사 등의 조치를 받았다. 가해자에겐 가볍고 피해자에겐 고통뿐인 결과다.

신광영·곽도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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