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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재현]화학은 불안이 아닌 축복

입력 | 2013-03-04 03:00:00


김재현 한국화학연구원장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1830년대 프랑스 파리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대부분 건물 외벽은 칙칙한 회색이다. 실내 인테리어도 어둡고 단조롭다. 등장 인물들도 더러운 옷을 입고 찌든 얼굴이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해도 지금 우리 주변과는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이런 차이를 가져온 대표적인 원인은 뭘까. 당시에는 바로 ‘화학’이 가까이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이나 귀족 같은 특권층을 제외한 일반 평민들의 삶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서 인류의 의식주에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석유에서 비롯된 플라스틱이나 페인트, 합성섬유는 주거와 의복에 편리함과 화려함을 가져왔다. 도시 건물들은 고기능성 페인트와 마감재를 사용해 밝고 역동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장실을 실내로 들어오게 만든 것도 성형이 자유로운 플라스틱 활용이 대폭 늘어난 덕분이다. 비록 빈민가가 배경이지만 레미제라블 속 등장 인물들의 얼굴과 머리가 지저분한 것도 따지고 보면 비누와 치약, 샴푸 같은 화학제품들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화학자들이 만든 질소비료와 작물보호제는 식량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수많은 인류를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시켰다. 특히 화학은 인류가 겪어온 질병의 고통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었다. 페니실린, 아스피린 같은 신약 개발이 바로 화학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인 노벨상은 20세기가 시작된 1901년에 제정됐다. 제정 이후 매년 노벨화학상을 통해 화학이 인류에 기여한 바를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노벨은 누구보다도 화학의 인류애적 가치와 경제적 효과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은 아직까지 화학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다. 최근 발생한 화학물질 누출 사고로 이런 현실은 더욱 악화되었다. 과학적 근거도 없는 괴담 수준의 소문들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사고가 대부분 안전운전을 소홀히 해서 발생하듯 화학공장 사고도 결국 안전 불감증에 따른 대표적 인재(人災)다.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국가 차원의 총체적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화학계 산학연이 책임 있게 실천에 나서야만 한다. 사고예방에 필요한 체계적 교육과 시설 및 재원 확충, 노후시설 개선, 전문가 양성 등에 힘을 모으는 것이다. 화학물질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혼란을 막고, 사고 수습에 필요한 해결 방안을 신속하게 제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한국화학연구원을 비롯한 우리나라 화학계는 화학산업이 당면한 문제점을 해결할 미래전략으로 ‘CHEMI(케미) 2020’을 수립했다. 이를 실현함으로써 화학산업이 지구환경을 살리고 대한민국을 무역 2조 달러 시대로 이끄는 희망의 산업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화학산업은 파스퇴르, 라부아지에, 퀴리 부인 등 세계적 화학자를 배출한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6위를 달리고 있다. 지난해 수출 부문에서도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화학이 국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화학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불행한 사고를 예방하고 사회적 현안에 대한 불필요한 갈등도 해결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재현 한국화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