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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인터뷰]김석희, ‘프랑스 중위의 여자’ 만나 소설을 버리다

입력 | 2012-12-29 03:00:00

■ 내 인생을 바꾼 책




상승가도(上昇街道)였다. 번역해 내놓은 책 ‘로마인 이야기’는 열풍이었다. 신문에 번역자의 인터뷰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던 때, 여러 언론사 지면에 이름이 걸린 기사가 실렸다. 세간에 얼굴이 팔리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하게 되고 성과도 좋아지는 선순환의 궤도에 올라탄 느낌이었다. 소설도 열심히 쓴다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어떤 문학상의 최종 심사 대상에 작품을 올릴 정도는 했다. 꽤 잘 쓴다는 소리도 듣고 있었다. 한쪽 손에는 번역을, 다른 손에는 소설을 가진 꼴이었다. “번역은 조강지처, 소설은 애인”이라고 헛소리를 해 가며 양쪽 살림을 꾸려 나가는 셈이었다. 그런 김석희(60·번역가·사진)에게 영국 작가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재번역하자고 출판사가 제안해 왔다. 1996년, 원본의 첫 장을 다시 펼치기 전까지 그는 이 책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알지 못했다.

두 손에 거머쥔 떡
제주도 촌놈 고집에는 신춘문예뿐이었다.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 같은 문예계간지로 등단해 봐야 고향에서 빛이 날 리 없었다. 정월 초하루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작품과 인터뷰가 실리는 신춘문예를 고수하며 끙끙댔다. 문학을 꿈꾸며 답답한 섬을 탈출하고픈 고교생 김석희는 삼수 끝에 들어간 서울대 문리대에서 글쓰기의 길을 재차 확인했다.

“(동기인) 그 애들의 지식체계가 나 같은 놈하고는 게임이 안 돼. 충격을 받아서 엄청나게 책도 많이 읽었지. 문리대라는 숲 속에서 걔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게 글 하나밖에 없겠더라고. 글만 썼어요.”

귀향한 김석희는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해 손자를 보고 나서는 깐깐하고 까다로운 기질이 조금 유해진 느낌이란다. 그가 제주시 애월읍 자택 근처 양배추 밭의 돌담에 앉아 푸근하게 웃었다. 제주=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포장마차서 소주 들이켜가며 쓴 소설, 신춘문예 덜컥 당선 ▼

번역가 김석희의 삶을 바꾼 책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 무렵 그는 제주도4·3사건을 다룬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 씨의 소설 ‘화산도’를 번역했다. 어려운 번역 작업이었지만 그만큼 열심히 했고, 책이 나오자 잘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번역도 제대로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소설이라는 떡과 번역이라는 떡을 두 손에 거머쥔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10년 가까이 소설 쓰기와 번역을 오가는 삶이었다. 서른여섯에 정식으로 발을 내디딘 소설 쓰기는 그를 자기 검열의 틀로 닦아세웠다. 20대였다면 좀 모자란 작품을 내도 스스로를 용서하거나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30대는 작품에 대한 주위의 시선에 더해 자신의 시선까지 의식해야 했다. 힘들게 쓴 만큼의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지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가졌던 글쓰기에 대한 욕망, 갈증 같은 것은 번역이라는 또 다른 글쓰기로 얼마간 해소되는 것 같았다. 문학을 하고자 하는 마음 밑바닥에 있던 글을 쓰려는 미련, 욕망, 혹은 욕심이 번역을 하면서 가끔씩 달래졌다. 창작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옅어지고 식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질 무렵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맞닥뜨렸다.

이 책은 그가 1982년에 번역했던 것이다. 용돈벌이 삼아 간간이 맡던 번역일 중 두 번째 작품이었다. “처음 (이 책을) 번역할 때는 텍스트 속에 내가 갇히고 빠져서 헉헉대느라 내가 가는 게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러나 10여 년 번역을 하면서 번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게 되고 나니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먼저 했던 내용을 좀 고치면 되겠거니 했다. 막상 책장을 펼치니 전혀 아니었다. 번역에 눈을 뜬 그에게 파울즈가 쓴 원문의 스타일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문이 갖고 있는 맛이 보였다. 바위를 정으로 쪼듯 갈고닦으면서 쓴 문장들이 보였다. ‘아, 대단한 작품이구나.’ “내가 (번역의 맛을) 알 정도가 됐기 때문에 외부의 평가와 관계없이 나 스스로 봐서 엄청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정도의 글은 쓸 수 없을 텐데 소설을 쓰자고 머리 쥐어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도저히 뚫어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을 돌파하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꼴이 우습고 가련하고 한심했다. ‘소설을 버리자.’

어떻게 보면 핑계고 달리 보면 절절함이 마음속에 있었다. 파울즈가 이 걸작을 썼을 때의 나이(41세)를 훌쩍 넘어버린 그에게 ‘만날 고만고만한 소설만 쓰고 말 텐데… 버리자’는 생각은 자연스러웠다. “어쭙잖은 소설이나 번역하면서 소설을 놨다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을 텐데, 이걸 하고 나니까 소설 안 써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요.”

1997년 문예지 ‘동서문학’에 실은 중편을 마지막으로 그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프랑스 중위의 여자’는 그의 인생을 소설에서 번역으로 가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10년’
김석희는 “서울대 나온 소설가 출신이라는 착시현상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번역가로서 그의 이름은 초창기부터 믿음을 얻었다. 그는 “좋은 작품, 좋은 출판사, 좋은 독자를 만난 행운아였다”고 하지만 사실 번역가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도 ‘재야의 고수’쯤은 됐다.

물론 편한 인생만은 아니었다. 고단하고 덜컥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잘 버텼다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시절이 있었다. 1979년 군대를 제대하고 1988년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전까지가 그랬다. 방향이 설정되지 않은 낭인의 삶이었다. 가장 일을 많이 하고 활발해야 할 때 그는 할 일이 없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짤막짤막한 번역 주문을 맞추며 용돈을 벌고 술을 마셨다.

그야말로 각종 번역이었다. 잡지사에서 맡기는 간단한 꼭지들하며, 여성 월간지의 권말부록용 번역도 심심찮았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최신 잡지에 나온 내용, 이를테면 꽃꽂이 같은 것을 옮겼다. “어느 날 갑자기 번역이 막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소소한 일을 하면서 실력이 알게 모르게 다져진 거지요.” 특히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글판을 번역하면서 실력이 부쩍 향상됐다. 하루 8∼10시간을 할애해 2년 동안 이 사전의 역사, 문학, 지리 항목 번역을 도맡아 했다.

알게 모르게 번역가로서의 자질을 길러 가면서 한편으로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시켜 놓고 소설을 썼다. 인천 간석동에 살 때였다. 지금의 습관처럼 그는 오후 10시쯤 되면 소설 초고 뭉치를 들고 동네 어귀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써 놓은 것을 다시금 흩뜨려 놓고 싶어질 때였다. 근처 골목의 카바레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나와 밤참으로 국수를 먹으며 수다를 떨다 돌아가고, 조금 있으면 술꾼들이 몰려와서 또 한바탕 휩쓸고 갔다. 옆자리의 잡담을 들으면서 주인장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슬쩍 원고를 내려다보면 고치고 싶은 게 생겼다. “묘한 기분이더라고. 공기가 막 바뀌는 그런 느낌? 혼란 속에 나 자신을 던져 놓으니까 초고를 고치는 데 좋더라고.” 그 포장마차에서 신춘문예 당선작이 나왔다.

스스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는 그 시간은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과 묘하게 겹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답답한 시절이었다. 스스로를 아무렇게나 막무가내로 내동댕이치던 때였다. 그럼으로써 심리적으로 편하기도 했던 때였다.

그는 하나하나 따져 보면 온전할 것이 없는 시간이었고 삐걱삐걱도 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게, 무난하게 살아온 삶이었다고 돌아본다. 반(半)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정이 담긴 이야기로 하자면 이렇다. “가령 내 전생에 김석희라는 인생이 있어서 몇 번의 윤회를 거쳐 쌓아 놓은 공덕을 내가 현세에서 다 까먹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 나 다음 생에 태어날 김 아무개는 얼마나 지옥같이 살 것인가.”

제주도
머물러 있으면 그 모양 그 꼴로 사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뛰쳐나가고 싶어 못 견디겠어서 뭍으로 향했지만 거기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항상 돌아와야지 했다. 섬이라는 곳은 한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하기 어려운 고향이다. 육지의 고향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야 한다는 욕망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김석희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들어설 무렵 당시 제주에서 생존해 계시던 아버지가 문득 “어디든 땅 하나 사두라”고 말씀하셨다. 온다고 말은 하는데 땅이라는 걸 사놓지 않으면 저 장남이 과연 올지 확신이 없으셨을 터이다. 아버지 말에 귀 기울이던 그는 2003년 힐러리 클린턴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를 번역하고 받은 인세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집의 땅을 사두었다. 2006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그가 현재의 집을 짓는 것을 보지는 못하셨다.

그는 지금 소설을 하나 구상하고 있다. 독자들이 소설가 김석희는 잊었어도 번역가 김석희가 옮긴 책은 읽어 준다는 게 즐겁기는 하지만 은근히 배알이 꼴리기도 한다는 그이기에 이 또한 자연스럽다. 일종의 지적 판타지다. 자신이 번역한 ‘몽테뉴’ 평전의 저자인 일본 좌파 지식인 홋타 요시에(작고)가 그를 부르더니 갑자기 몽테뉴(1533∼1592) 선생을 만나라고 부탁한다.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 보이지 않는가. 그가 몽테뉴의 성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서재에는 그 시절의 몽테뉴가 앉아 있다. 현대 동양의 지식인과 르네상스기 유럽 지식인의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종횡으로 교차한다. 타임머신? 그런 장치는 너무 뻔하다. “공간 이동을 했는데 그게 아예 시간 이동까지 해 버리는…. 허허허.” 어쩌면 그를 소설가로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주=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