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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이재명]어설픈 쇄신 경쟁이 치를 대가

입력 | 2012-11-19 03:00:00


이재명 정치부 기자

1989년 12월 시민단체들은 임대차보호법 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세 기간을 2년 이상 강제하자는 주장이었다. 치솟는 전세금으로 아우성치는 서민들의 고통을 줄이자는 명분 앞에 반대 주장은 사그라졌다. 이 제도를 도입한 결과는 어땠을까?

집주인들이 2년 치 인상분을 한꺼번에 올리면서 전세금이 되레 뛰었다. 세입자도 난감해졌다. 2년 계약이 족쇄가 돼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다. 서민 보호책은 서민 고통책이 됐다. 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주장한 시민단체는 사무실 벽에 이렇게 써 붙여 놓았다고 한다. ‘임대차보호법을 잊지 말자.’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가 펴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에 나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쓸모없는 ‘무용(無用) 지식’이 머릿속에 박히면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경고했다. 무용 지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다.

5년 주기의 대선 장터에 나선 각 후보의 좌판마다 무용 지식이 넘쳐난다. 그것도 쇄신이라는 미명 아래.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에 대한 정당 공천 폐지가 대표적이다. 명분은 흠잡을 데 없다. 지금까지 정당 공천으로 지방자치가 중앙에 예속돼 반쪽짜리였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다.

현역 의원에게 가장 큰 정적(政敵)은 시장·군수다. 이들은 예산과 인사를 틀어쥐고 지역여론을 좌지우지한다. 365일 선거운동이 보장된 셈이다. 공천권이 없는 국회의원이라면 이들에겐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국회의원의 기득권을 빼앗는 데 카타르시스를 느낀 나머지 뒷일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그건 무용 지식이다. 국회의원과 기초단체장이 무한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오면 지금도 찾아보기 힘든 ‘국민의 대표’는 여의도에서 멸종될 게 뻔하다. ‘깜’도 안 되는 지역예산을 챙기고 지역 민원에 ‘몰두’하느라 민의의 전당은 ‘민원의 전당’이 될 것이다. 국가 전체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 18대 국회에서 폐기된 군공항 이전 법이 버젓이 되살아나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과하는 걸 보라. 유승민 국방위원장의 지역구가 군공항이 있는 대구 동을이다.

지역에선 돈 있고 방귀깨나 뀌는 이들이 한줌의 권력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일 게 뻔하다. 기초의원이 시장·군수 되고, 시장·군수가 금배지를 다는 세상이 온다는데 누가 눈치를 보랴.

서울의 한 당협위원장 얘기다. 자신이 공천을 준 구의원의 자녀가 결혼을 했다. 정치인은 봉투를 건넬 수 없지만 늘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니 인정상 10만 원짜리 수표를 냈단다. 4·11총선을 앞두고 그 구의원에게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수표의 일련번호가 찍힌 사진이. 이게 풀뿌리 정치의 한 단면이다.

정말 지방자치를 살리고 싶다면 행정체제를 바꿔야 한다. 기초의회를 없애고, 공무원 월급도 못 주는 기초단체를 통폐합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 말을 못 한다. 몰라서가 아니라 정당의 말초신경인 지역 조직을 들쑤시다 표만 잃을까 봐서다. 2010년 4월 여야는 어렵사리 구의회 폐지에 합의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치러지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없던 일이 됐다.

어설픈 쇄신은 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야권 후보들이야 정치 햇병아리들이니 그렇다 치자. 15년 정치를 한 분도 다르지 않다. 아직까지 무용 지식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다면 양심불량이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니 더 걱정이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