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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자전거 고쳐 1300대 기증… ‘가스통 아저씨’의 인생 재활용

입력 | 2012-06-16 03:00:00

■ 무료 자전거 수리점 운영 북파공작원 출신 설동춘 씨




설동춘 씨가 1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4가의 ‘자전거 무료 이용 수리센터’에서 땀을 흘 리며 고장난 자전거를 손보고 있다. 북파공작원 출신인 설 씨는 고물상에서 사온 자전거나 버려진 자전거를 수리하며 새 인생을 찾았다. 중구청 제공

“어서 오세요. 여기는 자전거 고치는 곳이에요∼.”

서울 중구 을지로4가 중부시장 인근 ‘자전거 무료 이용 수리센터’ 간판이 달린 컨테이너. 땀 흘리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던 북파공작원 출신 설동춘 씨(61)는 1일 오후 맨손으로 찾아온 기자에게 ‘잘못 온 것 아니냐’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선 설 씨와 자전거 기술자 10명이 자전거를 무료로 고쳐준다. 타이어 휠 튜브 등 부품은 원가만 받는다. 고장 난 자전거를 수리해 때 빼고 광 낸 뒤 소외계층에 기증도 한다. 수더분하게 웃지만 다부진 체격의 설 씨는 한때 북파공작원이었다. 군 입대를 기다리던 스무 살 때 “권총 차고 양복 입어볼래?”라는 말에 넘어가 강원도 오지로 끌려갔다. 5년 동안 ‘두더지 숨기, 맨손 격투’ 등 모진 훈련을 받았다.

“훈련 끝에 죽음을 무릅쓰고 여러 차례 북한에도 갔죠. 밤에만 7분 능선을 타고 가던 길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러나 이른바 공작원으로서 더이상 활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돼 공작원에서 배제되는 ‘공작 해고’를 당하고 나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부의 감시와 사회의 냉대뿐이었다. 군번도 계급도 주지 않았다. 2002년 ‘가스통 시위’로 알려지기까지 북파공작원은 살아있되, 사회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존재였다. 그나마 시위 이후 정부가 뒤늦게나마 보상금을 지급한 게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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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연락이 끊겨 간신히 집을 찾아갔어요. 그동안 부모님은 ‘아들이 군대 안 가려 도망갔다’고 말하는 헌병들에게 시달렸다고 하더군요. 취직도 할 수가 없었어요. ‘조국이 나에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울화통이 터지더군요.”

채소를 팔고, 공사장에서 벽돌도 나르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작은 표구점을 열기까지 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주먹다짐을 벌이다 ‘깡패’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동료들의 삶도 설 씨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공작 해고 된 뒤 4년이 지나서 결혼했다. 북파공작원이었다는 사실에 결혼도 순탄치 않았다. 처가의 반대로 결혼식장은 텅 비었다.

“하객 18명, 축의금 4만8000원.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단칸방이 작아 장롱을 눕혀 놓았죠.”

열심히 살았다. 아이들도 번듯하게 키웠다. 그런데도 음지에서 숨어 사는 듯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동네를 다녀도 ‘보수꼴통’ ‘가스통 아저씨’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2008년 서울 중구에 사는 동료들을 모아 “우리 깡패 아니다. 이렇게 살지 말고 좋은 일 한번 해보자”고 설득했다. 담배 피우고 친구를 괴롭히는 불량 청소년 선도활동부터 시작했다. 우락부락한 가스통 아저씨들이 출동하면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봉사에 재미가 붙었다. 모여서 자전거 수리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름값이 오르면서 자전거의 인기도 높아지던 때였다.

“당장 중고 자전거나 부품을 살 돈은 없었지만 몸 쓰는 일은 자신 있었어요.”

동네 공사장을 찾아가 고물을 수집해 팔았다. 고물 판 돈으로 자전거 부품과 연장을 샀다. 고물상에서 자전거를 사 오거나, 버려진 자전거를 주워 와 수리했다. 녹은 깨끗이 제거한 후 광택을 입혔다. 2009년 7월 새 것 같은 자전거 150대를 저소득층 주민에게 기증했다. 이날 가스통 아저씨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마음이 녹아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처음으로 ‘나도 필요한 존재구나, 나도 인정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어요. 봉사로 새 삶을 찾은 거죠.”

이후 매년 인근 학교, 주민센터 등에 기증한 자전거가 1300대다. 한 대에 10만 원씩만 계산해도 1억3000만 원이다. 주민센터나 아파트 단지에는 정기적인 자전거 수리 봉사를 기다리는 단골도 많다. 중구는 자전거 부품 구입비 등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북파공작원을 외면했던 조국이 원망스러운지 물었다. 설 씨는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나라가 있으니 내가 있는 거 아닌가요?”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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