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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프리즘/홍권희]1989년 평양, 임수경이 다녀간 뒤

입력 | 2012-06-14 03:00:00


홍권희 논설위원

임수경은 1989년 몰래 평양에 들어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김일성은 한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자 체제경쟁 차원에서 좌파청년 축제를 유치했다. 외국인들이 “평양이 서울만 못하다”고 할까봐 해외 참가자들에게 과도한 편의를 제공하느라 주민이 큰 고생을 했다.

평양축전이 부른 未공급과 시장化


북한 주민들은 청바지와 면 티셔츠 차림에 거침없이 행동하는 임수경을 보며 ‘병영(兵營)사회’의 철저한 통제로부터 ‘정신적인 해방’을 경험했다고 김일성대 출신 탈북자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전한다. 북은 ‘남한에도 수령을 따르는 대학생이 많다’고 인식시키는 ‘임수경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민은 ‘당국의 교육과 달리 남한에서는 자유롭고 멋있게 산다’고 느끼는 ‘임수경 역효과’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경제적 후유증도 컸다. 북한에서 취재해 중국에서 발간하는 잡지 ‘림진강’ 1호(2007년)에서 북한 국영기업 간부 계명빈(가명)은 “‘미(未)공급’이 시작되고 북한경제가 파탄 난 동기가 ‘13차’”라고 말했다. 13차는 평양축전의 약칭이고 미공급이란 국가가 주민들에게 노임과 식량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공장을 돌리고 나라살림을 꾸릴 원자재와 노동력을 빼돌려 무리하게 체육관과 행사장, 호텔을 짓는 데 쓴 후유증이다.

김일성은 “13차 축전 준비가 매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 소도시 건설사업은 일단 중단했다”고 털어놓았다고 옛 동독의 외교문서는 전한다. 13차의 총비용은 32억 달러, 40억 달러, 60억 달러 등으로 알려져 확실치 않다. 서울 올림픽의 총비용인 약 35억 달러보다 더 든 것 같다. 당시 남북한 경제규모 차이는 5.5 대 1이었다. 이즈음 남포서해갑문, 순천비날론공장 건설 등 대형 투자도 북한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다.

결국 주민은 대기근에 허덕였고 북한은 1995년 세계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다. 옛 소련의 붕괴로 원조가 끊기는 등 여러 요인이 겹쳐 국내총생산(GDP·한국은행 추계)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북한도 잘나간다’고 세계에 선전하는 ‘평양축전 효과’는 한순간이었고 그 후유증으로 경제마비가 심해지는 ‘평양축전 마이너스 효과’는 훨씬 컸고 오래갔다.

굶주린 주민은 산과 들에서 먹을거리를 찾기도 하고 뙈기밭도 일궈 연명했다. 식량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장마당(농민시장)에서 거래한 결과 몇 년 만에 거대한 암시장이 전국에 생겨났다. 정부 공식 유통망에는 상품이 거의 없었지만 수입품까지 가세한 암시장엔 없는 게 거의 없었다. 스티븐 해거드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정부 정책이 아니라 대기근이 시장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북한 당국이 주민으로부터 시작된 시장화를 떠밀리듯 공식 인정한 것이 2002년 ‘7·1조치’였다. 만 10년 전의 일이다.

궁정경제 해체해야 북한경제 회생


계명빈은 “‘상점마다 상품을 쌓아놓고 노동당 대회를 하겠다’던 김일성의 숙원을 이룬 것은 대기근의 부산물인 장마당”이라고 말한다. 평양 시민도 장마당 덕분에 생물 가자미 맛도 보게 됐고 당 간부나 먹을 수 있었던 파인애플 등 남방과일과 중국 수입상품을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주민의 힘으로 만든 시장이 확대되자 북한 정부는 각종 세금을 매기고 있다. 당과 군은 특권적 무역회사와 은행까지 갖춰놓고 외화벌이를 한다. 김정일은 돈벌이를 보장하는 무역허가권을 쥐고 충성경쟁을 유도했다. 이렇게 챙긴 거액의 달러는 권력층을 위한 선물 구입이나 현지지도 격려에도 쓰였다. 국가 몫, 주민 몫을 빼돌려 권력 유지에 쓴 것이다. 탈북자인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궁정경제(특권경제)의 해체를 북한경제 회생의 첫걸음으로 꼽는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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