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부자들 비판하는 영화를 부자가 만들어 富모은다?

입력 | 2012-05-29 03:00:00

두 남녀 ‘돈의 맛’ 보기




영화 ‘돈의 맛’에서 섹시한 남자 비서 역을 맡은 배우 김강우. 시너지 제공

세상만사를 과도할 만큼 진지하게 바라보는 ‘진지남’과 매사에 불만투성이인 ‘투덜녀’가 최근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되었다가 수상하지 못한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17일 개봉)을 도마에 올렸다.

진지남=왜 ‘돈의 맛’이 상을 못 받았을까? 지난해 ‘하녀’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뒤 연속해서 임상수의 작품이 경쟁부문에 초청된지라 내심 기대가 컸는데 말이야.

투덜녀=난 애초부터 이 영화가 수상하지 못하리라 확신했어. 최상류층의 사생활을 전시하면서 깐죽대기만 할 뿐 정작 감독 자신의 세계관을 찾아볼 수가 없잖아? 임 감독이 최근 내놓은 영화들을 보라고. ‘그때 그 사람들’ ‘하녀’ ‘돈의 맛’…. 알고 보면 다 똑같아. 최고권력자나 부자 같은 ‘센 놈’을 골라 씹어대고 비아냥거리는 거. 도대체 감독 자신의 생각이란 게 뭐야?

진지남=당신은 매사에 부정적이군. ‘돈의 맛’에는 일정한 미학적 성취가 있어. 느물거리는 카메라의 동물적인 움직임을 봐. 캬! 죽이잖아? 미장센도 밀도가 무지하게 높아.

투덜녀=그래봐야 뭐해? 진정한 예술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라고!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예술을 완성시키는 건 작가의 내면적 고민과 성찰이지. 불평불만이 예술이면 나야말로 최고의 예술가이게?

진지남=아냐. 이 영화에는 부에 대한 감독의 뚜렷한 시선이 담겨 있어. ‘부는 굴욕과 고독을 숙명적으로 부른다’는 거지. 서른 살은 어린 듯한 남자 비서의 근육질 다리에 허벅지를 비벼대면서 “오우, 컴 온 베이비” 하는 재벌 안주인을 봐.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또 외로워 보이냔 말이야. 이런 냉소와 블랙유머, 그것들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묘하게 쓸쓸한 공기, 이게 바로 임상수의 세계야.

투덜녀=돈의 맛에 중독된 사람들이 결국 스스로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아유, 정말 ‘올드’한 문제의식 아닐까?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어. ‘임상수가 부자들을 냉소하거나 미워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부자를 동경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야.

진지남=오잉? 뭔 말이야?

투덜녀=잘 보라고. 최상류층을 비판한답시고 이 영화는 외려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러닝타임 절반 가까이를 할애하고 있어. 5만 원짜리 뭉칫돈을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거나, 서민아파트 한 채 만한 크기의 서재에서 가슴 큰 필리핀 하녀와 습관처럼 섹스를 하거나, 바닷가재를 햄버거 하나 먹듯 무료하게 먹어치우는 모습들을 도착에 가깝도록 묘사하지. 하지만 나는 ‘이 부도덕한 자들’이라며 열 받기보다는 외려 ‘우왕, 나도 저렇게 한번 살아봐야 하는데’ 하고 부러워하게 되었거든? 살인마를 비판한다면서 살인마가 살인을 즐기는 101가지 짜릿한 이유를 서술하는 책과 다를 바 없단 얘기지. 이 영화는 부자를 비판하지만 결과적으론 부자에 대한 서민들의 판타지를 더욱 강화시켜. 어쩌면 이 영화가 내밀하게 숨겨놓은 상업적 노림수인지도 모르지만.

진지남=으음, 이런 현상을 두고 ‘예기치 않은 결과가 빚어내는 모순이나 부조리’, 즉 아이러니라고 불러.

투덜녀=더 웃기는 아이러니가 있어. ‘부도덕한 최상류층을 실컷 미워하라’고 부추기는 이 영화에 제작비를 투자한 것은 재벌기업이니 말이야. 부자의 돈으로 부자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어 부를 모은다?

진지남=으음, 그런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고 전문용어로 ‘선순환구조’라고 하는 것이야….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