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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판결에 구애받지 말고 원점서 재검토하라” 김능환 대법관의 소신

입력 | 2012-05-28 03:00:00

강제징용 배상 판결때 청구권 적극해석 주문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대법원의 첫 손해배상 인정 판결에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에 관한 쟁점이 새롭게 포함된 것은 이 사건 주심인 김능환 대법관의 남다른 소신과 해박한 법리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당초 이 사건의 1, 2심 쟁점에는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해석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지만 ‘민사법의 대가(大家)’인 김 대법관이 판결의 법적완결성을 구현하기 위해 원심 판결문이 직접 쟁점으로 삼지 않았던 한일청구권협정까지 쟁점으로 다뤄 대법원 판결문에 넣었다는 것.

27일 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김 대법관은 강제징용 피해 배상 판결을 검토하면서 “1, 2심 쟁점 판단에 머무르는 일반적 대법원 판결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김 대법관은 사건의 기초 자료와 쟁점을 정리해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들에게 “국내외 기존 판결과 다수 의견에 구애받지 말고 사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강조했다는 후문이다. 현재 대법원에는 ‘전속재판연구관’이 대법관마다 3명씩 총 36명이 배치돼 있다. 또 특정 대법관에 전속되지 않으면서 중요사건을 공동으로 연구하는 ‘공동재판연구관 68명이 있다.

이에 따라 민사를 담당하는 공동재판연구관 2개조(1조는 10∼12명) 가운데 5, 6명은 2009년 3월 이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된 직후부터 3년여간 자료수집과 법리 검토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 사건의 원고들이 과거 미국과 일본에서 소송을 내 패소했던 판결문 원문은 물론이고 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패소한 판결문도 샅샅이 살펴 외국 판결이 어떤 논리로 구성돼 있는지를 치밀하게 파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주변국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노역을 시킨 독일 기업들이 재단을 만들어 피해를 배상한 것을 연구한 국내 논문들도 심도 있게 검토됐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3년간 수집한 자료를 쌓으면 최소 2m는 넘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쟁점에 대한 기초분석과 검토는 시작에 불과했다. 김 대법관은 검토결과를 보고받을 때마다 보완이 필요한 쟁점을 지적해 추가 검토를 지시했다. 한일청구권협정 해석 등 난해한 새 법리를 구성하는 것은 온전히 김 대법관의 몫이었다. 징용피해자 사건 외의 다른 일반 사건도 배당받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탓에 김 대법관은 밤에 대법원 청사에 남아 일하는 날이 잦았다. 대법관의 야근이 늘자 보좌하는 재판연구관들은 더 바빠졌다. 재판연구관은 원래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이 사건을 검토한 연구관들은 평일에 매일 야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말 이틀 가운데 하루는 출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의 내부 검토 과정에서는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을 판결에 포함할지를 놓고 일부 신중론도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정부가 외교적으로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어서 이번에는 일본 판결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정도만 대법원 판결문에서 밝히고 파기환송심에서 먼저 판단한 뒤 대법원이 최종 판단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김 대법관은 “이번 기회에 대법원이 최종적인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천명을 해야 한다. 17년간 소송에 매달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를 더는 미루게 해선 안 된다”며 적극적으로 사안을 밀고나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은 “사건의 합의과정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외부로 새나간 적이 없다”며 “이 부분은 알 수도 없고, 알려져서도 안 되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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