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세 사람 모두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국민가수지만 이날 제 마음을 온전히 빼앗은 이는 장사익이었습니다. 그는 노점상, 가구점 점원, 카센터 직원, 독서실 총무 등 15가지 직업을 전전한 뒤 46세에 소리꾼이 됐다고 합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찔레꽃’ ‘봄날은 간다’ ‘꽃구경’을 절규했지만 이날 제 마음을 울린 것은 ‘봄비’였습니다. 그의 절창에 마음을 빼앗겨 맥 놓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때마침 오랜 가뭄을 뚫고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콩, 콩, 콩” 천창(天窓)을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마당에 나가 오는 비를 맞으며 장사익이 부른 박인수의 ‘봄비’를 조용히 불러보았습니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유년시절 비올때마다 듣던 그 노래
유년 시절 서울 광화문 인근 새문안교회 건너편에는 경기여고로 향하는 골목이 있었습니다. 양옆에는 학생들로 붐볐던 덕수제과, 프린스제과, 책을 싸게 팔던 숭문사, 메밀국수를 팔던 미진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던 작은 전파사에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박인수의 ‘봄비’가 흘러나왔습니다. 비닐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고 종종걸음으로 광화문 육교를 건너던 사람들은 ‘봄비’ 노래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곤 상념에 젖은 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투병 중인 가수 박인수 씨
10년 전 이맘때였던 것 같습니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자 막다른 골목 끝에 컨테이너 박스를 연결한 작은 요양원이 나타났습니다.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는 어두운 거실이 있었고 할머니 두세 명이 함께 기거하는 작은 방들이 나타났습니다. 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누워 계시는 할머니들이 보였습니다.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봄비’였습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봄비가 갑자기 어두운 거실에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움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음색이 많이 탁해지긴 했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그 노래였습니다.
그가 내 놀란 표정을 보았을까. 아니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에게 관객의 표정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이윽고 노래를 마친 그는 천천히 기타를 들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문을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박인수 씨는 젊음도, 돈도, 명예도 모든 것을 잃고 이곳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위암과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날 요양원을 나서며 모진 세월을 이기고 제발 그가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투병중인 박인수씨 건강 되찾았으면
그런데 10년 동안 그를 잊고 지내다 장사익이 부른 ‘봄비’를 듣고 번쩍 정신이 든 거지요. 마음을 졸이며 지난주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젊은 여성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봄비 노래를 불렀던 박인수 씨가 아직 그곳에 계신가요?” 제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습니다. “네, 그럼요.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 그가 건강해졌구나!’ 저는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올봄에는 봄비가 많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