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시인 신경림이 말하는 40년지기 김근태, 남북, 그리고 한국사회

입력 | 2012-01-13 03:00:00

“유신반대로 中情 끌려간 근태, 내가 弔詩 쓴 사실 끝내 안불어”




《 “장지에는 못 갔어. 조문만 갔지. 사람 많이 왔더라고. 살아있을 때 언론에서 많이 다뤄줬으면 좋았을걸. 그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 중에서 고생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고, 가장 큰 역할도 했고.” ‘아우’를 먼저 보낸 ‘형’의 눈동자에는 둘이 함께한 세월이 스쳐 지나는 듯했다. 신경림 시인(77)과 열두 살 아래의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두 사람은 1975년 처음 만나 김 고문이 지난해 12월 30일 타계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형’ ‘아우’ 하며 지냈다. 1956년 등단한 시인은 1975년 자유실천문인협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이사장,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며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단의 원로다. 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은 먼저 간 아우를 ‘김근태 씨’ 혹은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야기는 고인에 관한 회상으로 시작해 남북 관계와 선거, 사회 문제에 대한 문답으로 이어졌다. 》

“김근태 씨는 많은 사람이 한 일을 자기 혼자 책임지고서 당했지. 한 번 맞을 걸 두 번 맞은 거야.” 신경림 시인은 아우처럼 아꼈던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생전 행적을 돌아보며 많이 안타까워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김 고문을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1975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김상진 서울대 농대 학생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조시(弔詩)를 써달라고 찾아왔어. 조시를 내가 쓰고 조문은 황석영이가 썼지. 만약 김근태 씨가 (중앙정보부) 들어갔을 때 우리(신경림과 황석영)가 썼다고 하면 우리도 잡혀 들어가는 건데 끝내 안 불더라고. 우린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많은 사람이 한 일을 자기 혼자 책임지고서 당했지. 한 번 맞을 걸 두 번 맞은 거야.”

―김 고문 생전엔 어떻게 부르셨나요.

“난 ‘근태야’ 했고 김근태는 ‘형님’ 했지.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밖에서 만나면 ‘김 의장’이라고 불렀어. 김근태 씨도 어렸을 때부터 시나 소설에 조예가 깊었어. 형(김국태·2007년 사망)도 소설가잖아. 문인들 하고 교류도 많았지.”

―마지막으로 만난 건 언제인가요.

“지난해 봄에 내가 (고인과 연탄 나눔 행사를 위해) 개성 갔다 왔는데 그때만 해도 그렇게 아프다 그러지 않았거든. 그냥 몸이 굉장히 안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일이 생길 줄 몰랐지.”

―2002년 대선 때 ‘근태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말도 하셨다는데….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합리적인 사람이야. 남의 말을 잘 듣고 소통이 잘되는 사람이지. 상당히 강인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사실 안 그래. 정치인은 사기꾼 기질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게 그 사람이 정계에서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이유일 거야.”

―여러 번 북한을 다녀오셨는데요, 경색된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면 좋을까요.

“평양 두 번, 개성 두 번, 금강산 두 번, 그러니까 꽤 많이 갔다 왔지. 북쪽 체제가 합리적이지 않고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하지만 열어줘야 해. 퍼준다 그러지만 100만 원 갖다 주면 100만 원짜리의 무언가가 여기(남한)에도 생기는 거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 북한이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군부의 사람들이 그랬겠지. 국가 대 국가는 응징해야지. 하지만 (북한) 주민과는 별개로 해야 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선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김정일이는 상당히 배포가 있었지. (당시 송별 만찬에서) 우리와 술을 먹는데 김정일이는 와인 같은 걸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면서 원샷을 막 하는 거야. 노무현이는 뭐 술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잖아. 김정일이는 그때 막 벌컥벌컥 들이켜더라고.”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습니다.

“골수 보수파는 설자리가 없을 거야. 그렇다고 나는 좌파가 득세하리라고 생각 안 해. 좌파 중에서도 ‘골 때리는’ 사람이 많거든. 헛소리를 자꾸 해. 중도적인 사람들이 득세할 거야. 안철수라는 사람도 사실 중도적인 사람이거든. 박원순을 좌파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사람은 내가 볼 땐 중도주의자야. 개혁주의자이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은 박원순 정도지.”

―요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보십니까.

“직장 없는 사람이 참 많아. 일자리를 나눠야 된다고 생각해. 노조도 문제야. 자기들 임금이 조금이라도 삭감되면 큰일나는데 계약직에 대해서 좀 더 배려가 있어야지. 많이 받는 사람이 양보를 해야지.”

―서울 광화문 등에선 시위가 자주 열립니다.

“늘 꾼들이 나와서 한다고 뉴스에서 자주 그러지만 전부 꾼들이 나오는 건 아니야. 진짜 못살겠어서 나온 사람도 많아. 물론 꾼도 있지. 시위만 있으면 신바람 나게 쫓아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시위를 주도하진 못해. 진짜로 시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하는 시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해.”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요.

“가진 자들이 좀 양보해야지. 또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나라가 그만큼 성숙해졌잖아. 그까짓 거 수용해도 오히려 숨어 있는 사람들 드러내고 좋지. 지금 빨갱이라고 찾아보면 전국에서도 아마 몇 사람밖에 없을 거야. 지금 북한 체제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돼. 북한 체제 인정하는 사람은 ‘또라이’ 소리 듣지 정상적인 사람이야? 균형 잡힌 생각 가진 사람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얘기지.”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이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故 김근태 전 고문

“그들보다 ‘구체적으로 노골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해야 한다는 거지. 무슨 파괴활동 같은 게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는. 공산당선언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예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꽤 있잖아. 뒤집어서 보면 공산당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이런 것까지 다 나가면 잘못하면 빨갱이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 허허….”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박고은 인턴기자 중앙대 불어불문학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