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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 양적성장 넘어 시장선도 모델 개발을”

입력 | 2011-10-24 03:00:00

KS마크 50돌… 전문가들 “국제 표준화 전략 절실”




2002년 국내의 중소기업인 경원엔터프라이즈가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대우일렉트로닉스가 판매한 ‘무세제 세탁기’는 2008년 국제표준을 획득했다.

무세제 세탁기는 세탁기 안에 장착된 전기분해장치가 일반 수돗물을 알칼리수로 변환시켜 세제 없이도 세탁과 살균을 한다.

세제를 사용하지 않아 친환경적인 미래형 가전제품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2009년 생산을 중단했다. 뛰어난 기술력에도 가전업계의 견제와 마케팅 실패로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것이다.

강병구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무세제 세탁기는 기술력으로 국제표준을 획득했지만 시장표준은 되지 못한 대표적 사례”라며 “기술력만을 갖고 있던 미국 퀄컴이 한국과 손잡고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시장표준으로 만든 것과 같이 한국 기업도 세계 표준화 전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올해로 정부의 표준 규격인 KS마크가 생긴 지 50주년을 맞아 국내 표준화 전략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이 표준화를 통해 시장을 독식하는 이른바 ‘표준 전쟁’이 한창이지만 정부는 양적인 성장에 집착하고, 기업은 무세제 세탁기의 실패처럼 표준화를 통한 사업 전략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의 주영섭 MD는 “과거의 한국 기업들은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종자)로서 남들의 표준을 따라가기 바빴지만, 이제 퍼스트 무버(시장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표준화를 전제로 한 사업모델 개발에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 표준 정책 기업이 아닌 정부가 주도

한국은 최근 정부 주도의 표준화 정책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23일 특허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국제표준화기관에 총 684건의 국제표준을 제안해 전체 제안(6220건)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표준화 활동의 양적인 성장에 비해 실제적인 성과는 크지 않다. 최근 중요성이 커지는 표준특허는 한국이 지난해 누적 기준으로 전체(8493건)의 264건(3.1%)만을 보유하고 있다. 정보기술(IT) 분야가 대부분인 표준특허는 표준을 따를 때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필수 특허로 하나의 표준에는 여러 개의 특허가 들어간다.

전통적으로는 표준에 특허가 포함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최근 IT 분야에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필수 기술이 개발되면서 표준특허가 새로운 ‘캐시카우’(현금창출원)로 떠오른 것이다.

현재 한국이 갖고 있는 대표적인 표준특허는 삼성 등이 갖고 있는 광대역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와이브로 등의 통신방식과 동영상압축방식인 MPEG4 등이다.

윤종구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 과장은 “표준화는 사업을 하는 민간 기업인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최근 10년간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며 “이는 기업들이 특허를 보유하고, 표준을 장악해가면서 사업을 해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양날의 칼’과 같은 표준화 전략

1970년대 초 소니와 마쓰시타는 비슷한 시기에 비디오테이프 레코더(VTR)를 개발했다. 화면의 선명도나 용량 등 기술은 소니의 베타 방식이 우월했지만 소니는 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다. 반면 마쓰시타는 재빨리 자사의 VHS 기술을 공개해 히타치, 미국 RCA 등과 공동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사용자가 많은 VHS 방식으로 홈 비디오 영화를 만들었다. 결국 소비자들은 영화 테이프를 쉽게 구할 수 있는 VHS 방식의 기기를 선호하면서 소니의 제품은 시장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주 MD는 “표준 싸움에서 결국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는 사용자가 많을수록 시너지 효과가 커지는 이른바 ‘네트워크 외부성의 효과’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표준화를 했다고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표준화를 위해 기술을 공개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자들이 쉽게 모방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 정부는 일본 전체의 자전거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에서 자전거 부품 규격을 완전히 공개했다.

그러나 기술이 공개되자 중국, 대만 등 신흥공업국 기업들이 공개된 표준으로 만든 제품을 수출하면서 일본 자전거 제품업체는 도산 지경에 이르렀다.

강 교수는 “도시바는 DVD 경쟁에서 기술의 일부만을 공개해 시장을 키운 뒤에 핵심 부품을 삼성과 LG가 사가도록 유도해 이익을 내고 있다”며 “표준화는 기술을 공개해야 하는 만큼 ‘양날의 칼’과 같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표준화는 새로운 무역장벽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면서 무역 장벽을 낮추고 있지만 표준화가 새로운 유형의 무역장벽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가령 한국 기업이 수출을 할 때 다른 국가가 만든 기술 표준에 맞춰야 한다면 추가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한국이 만든 표준이 먼저 국제표준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윤 과장은 “수출전략지역에 한국의 표준체계를 수출하면 기술 규제에 사전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인증기관과 시험기기 제조업체, 시험전문인력이 늘어나면서 전 세계적으로 100조 원에 이르는 새로운 영역에 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