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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주성하]탈북자 ‘독침 간첩사건’은 시작일 뿐이다

입력 | 2011-09-19 03:00:00


주성하 국제부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민생단’ 사건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받는다. 민생단은 1930년대 초 일제가 동만주 지역에서 조중(朝中) 연합 항일세력을 와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직이다. 당시 일제가 침투시킨 ‘민생단’ 소속 첩자 몇 명이 체포되자 항일운동 대열에는 불신이 팽배해졌다. 급기야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민생단원으로 몰아 총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간부들도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무고한 동료들을 민생단원으로 고발했다.

일제가 만든 민생단 조직은 5개월 만에 사라졌지만 항일세력 내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기편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은 무려 3년이나 계속됐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핵심 간부가 많이 희생돼 동만주 항일투쟁은 한때 와해 직전까지 갔다. 일제의 공작이 성공한 것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에 “불과 8, 9명 정도의 민생단 혐의자 때문에 2000명 이상의 공산주의자가 자기편에게 학살됐다. 후대들은 절대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며칠 전 북한에 포섭된 탈북자가 같은 탈북자인 대북인권 운동가를 독침으로 암살하려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북한에서 교육받았던 민생단 사건이 떠올랐다. ‘원정화 사건’ ‘황장엽 암살단’에 이어 이번 사건까지 연관지어 보면 북한은 자신들의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인 민생단 사건을 남쪽에서 재연하려는 것 같다.

북한은 북에 가족을 둔 탈북자에게 접근해 가족을 볼모로 삼아 임무를 내린다.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죽이겠다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탈북자로 위장한 간첩을 직접 파견하기도 한다. 북한에 이들은 임무를 성공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소모품일 뿐이다. 남한 내 반김정일 활동을 위축시키는 동시에 눈엣가시 같은 탈북자들의 단결을 막고 한국 사회에 “탈북자는 잠재적 간첩”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남남갈등을 유발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차가운 의심의 시선 속에서 탈북자들이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마녀사냥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불신을 확산시킬 것이다.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민생단 사건을 되돌아볼 때 북한은 불신을 고조시킨 뒤 허위정보를 지속적으로 흘릴 것이다. “누구는 북한 편이더라”는 식의 음해 공작을 통해 의심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끼리 마녀사냥을 벌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북한이 바라는 대로 서로 의심하며 싸우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북한의 간계를 꿰뚫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의연히 대처하기를 기대한다.

주성하 국제부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