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양정무, 그림 제공 포털아트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面壁) 수행을 하던 어느 날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아직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에 달마대사가 짧게 응대했습니다. “너의 마음을 가져오너라.” 신광이 참담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달마대사가 담백한 어조로 마무리했습니다. “나는 이미 너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 그 순간 신광은 크게 깨쳤는데 그가 훗날 달마의 법을 이은 중국선종의 2조 혜가(慧可)대사입니다.
찾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마음으로 고생하고 번뇌하기는 무지한 중생이나 수도승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머물다가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해 어떤 소용돌이를 이루고 어떤 경로를 거쳐 다시 잠잠해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그것에 부대끼고 시달리며 숱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수련하기 위해 명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상담을 받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자폐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갈가리 찢겨 정신이 분열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단절 욕구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렇게 세상만사가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마음을 도외시하고는 인생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다면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마음과 자신이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덫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해야 합니다. 화를 내는 마음, 탐욕스러운 마음, 질투하는 마음, 좌절하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주시하면 그것은 빠르게 불길이 잡히고 오래잖아 가라앉습니다. 옹졸한 마음은 옹졸한 마음을 낳지만 한 번 열리기 시작한 마음은 무변광대한 우주의 마음을 낳습니다. 마음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마음이 열린다는 것, 집착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입니다.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