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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연욱]유승민의 추억

입력 | 2011-07-18 20:00:00


정연욱 논설위원

2005년 3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마지막 경유 도시인 로스앤젤레스에서 방미 일정을 마무리하는 뒤풀이 행사가 끝나갈 때였다. 뒤늦게 자리에 합류한 박 대표의 한 비서관이 다른 참석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던 유승민 대표비서실장이 갑자기 그 비서관을 옆으로 불렀다.

유 실장은 “다른 사람이 ‘박 대표’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시는 사람까지 ‘박 대표’라고 하면 되느냐”고 버럭 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비서관은 “대표님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변하면서도 무릎을 꿇었다. 유 실장의 ‘훈계’는 몇 분 더 이어졌다.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유 실장의 직선적 성격과 ‘권위’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일화로 회자됐다.

2007년 대선후보 당내 경선 때 유 의원은 이명박 후보를 겨냥한 폭로전의 선봉에 섰다. 박근혜 캠프의 한 관계자는 “당시 전면에 나서서 이 후보를 공격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유 의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유 의원은 친이(親李) 진영의 ‘안티 1호’가 됐다. 경선 패배 후 유 의원은 스스로 “자폐증에 걸렸다”고 말할 정도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2002년 대선 때 유 의원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핵심 측근으로 여의도연구소장을 맡고 있었다. 그해 봄 박근혜 의원이 당내 민주화를 내세우며 탈당하자 이회창 대세론에 파란이 일었다. 박 의원 탈당의 파문을 최소화하며 반격 카드를 준비하는 것은 유 의원 몫이었다. 일각에선 ‘박근혜 X파일’을 준비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당시 박 의원이 복당하지 않고 독자 후보로 대선 레이스를 완주했다면 지금의 ‘박근혜-유승민’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유 의원은 보름 전 7·4전당대회에서 2위를 차지해 친박(親朴)의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당 최고위원으로서 참모정치가 아닌 자기 정치를 보여줄 기회를 잡았다. 그가 친박이라는 정파의 벽 속에 갇혀 버릴지, 이를 뛰어넘는 정치의 새 지평을 보여줄지 지켜볼 일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위한 공천이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유 의원이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이회창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한 결정적 요인으로 ‘당내 세력 규합 실패’가 꼽힌다. 이에 앞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는 민정계 일부를 흡수함으로써 본선 승리를 다졌다.

2002년 대선 때 유 의원은 재도전에 나선 이회창 후보의 연설문을 도맡아 썼다. 이 후보는 김대중 정권을 향해 “지금 급진세력이 좌파적인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음모와 술수로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무원칙한 작태가 횡행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는데, 이것도 유 의원의 작품이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유 의원은 “부자를 편들고 가난한 사람을 내버려두는 게 보수냐”며 ‘좌(左)클릭’을 선언했다. 전면 무상급식 등을 정책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자유시장 경제와 성장의 가치를 지킨다고 했지만 정책의 접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재정 형편을 감안해 우선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급식을 하자는 게 과연 가난한 사람을 내버려두는 정책인가. 그는 “사회 양극화에 대한 평소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좌파 정권’을 맹공하던 모습과는 아무래도 매치가 잘 안 된다. 개혁적 보수주의자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18세기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를 정치적 멘토로 꼽았던 유 의원이기에 더 아쉽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