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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안택수]중기 상생협력, 거래관계 정상화부터

입력 | 2011-05-17 03:00:00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갑(甲)은 반듯하고 당당하다. 을(乙)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힌 꼴이다. 따로 두면 갑과 을은 대등해 보인다. 하지만 서로 관계를 맺으면 힘과 돈, 지식이 강한 갑이 약자인 을을 지배하고 만다. 이 세상의 이치다. 칼자루를 잡은 갑은 칼을 부리지만 칼끝을 잡은 을은 손 베이기 쉽다. 부유한 갑이 일거리를 준다며 부리려 들면 가난한 을이 갑을 물리치기 어렵다. 자칫 결정권이 없는 을은 갑에게 끌려가고 상처받기 십상이다. 주도권을 다투는 모든 곳에서 갑과 을은 충돌한다.

갑과 을의 관계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그것과 같다. 힘의 불균형 때문에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관계가 되기 마련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은 어느 나라, 어느 정부에서나 최우선적으로 내세우는 난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 법률까지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그동안 재계의 꾸준한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노력에 더해 정부가 제도적으로 개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 현장에서 느끼는 상생협력의 체감온도는 아직 싸늘하기만 하다. 무리한 납품단가 인하, 기술 도용, 일방적 계약 취소 등 대기업의 횡포는 여전하다. 상생협력은 대기업 일방의 희생이나 일시적 시혜 조치로 하자는 게 아니다. 전담조직을 만들고, 협력업체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에도 한계가 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은 바로 거래관계의 정상화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등한 협상이 가능하도록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질서부터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마주 보는 당사자, 함께 가는 동반자로서 중소기업을 인정해야 한다. 상생협력을 주창(主唱)하는 한편으로 불공정 하도급 관계를 강요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중소기업을 두 번 죽이는 기만이다.

최근 중소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금융위기를 겨우 벗어났더니 어느새 판매 부진, 인력난, 자금 경색, 원화 가치와 유가 급상승 등 악재들이 안팎으로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중소기업의 재무구조와 수익성은 외환위기 때보다 더 악화된 듯하다. 중소기업이 어려우면 대기업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다. 중소기업의 기반이 없는 글로벌 대기업의 성과는 사상누각일 수 있다. 중소기업이 겪는 고통을 대기업이 진심으로 이해한다면, 요란한 회의나 사진만 찍어대는 생색내기 행사부터 그만두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자금 조달에 관한 한 갑과 을인 금융기관과 중소기업 사이에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 이제 금융기관도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보증재원을 출연한다. 이 재원으로 신보는 중소기업에 보증료를 할인해 주거나 은행이 대신 납부하는 특별출연 협약보증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지원된 협약보증 규모는 6조 원에 이른다.

을인 중소기업 역시 혜택만 보고 돌아서지 않는다. 머지않아 충성도 높은 금융수요자, 즉 우량고객으로 성장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 대기업의 성과나 경쟁력은 대기업 혼자 잘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더 가진 형인 대기업이 덜 가진 동생인 중소기업과 함께 가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오월동주보다 ‘갑을동주(甲乙同舟)’가 쉽다.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