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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어느 외판원의 마케팅

입력 | 2011-04-24 21:16:13


며칠 전 출근길이었다.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버스에 올라타 제일 뒷자리에 앉았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의 신사가 탔다. 차분하게 정리한 머리에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중간에 서서 승객들에게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정신이 온전치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관심이 가는 몇 마디가 버스 소음을 뚫고 귀에 들렸다. '납품', '부도', '대기업 횡포'….

신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자신은 양말공장 사장이었는데 큰 기업의 담당자가 구두로 "고품질 양말 납품을 준비하라"고 얘기해 그것만 믿고 비싼 기계를 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담당자는 얼마 뒤 "계획이 바뀌었다"며 일방적으로 오더를 취소했다. 계약서를 만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신사는 고스란히 빚을 떠안고 결국 부도를 냈다. 전형적인 중소기업 피해사례였다.

그쯤에서야 신사의 목적은 양말 판매였음을 알게 됐다. 저렇게 들릴 듯 말 듯 자신의 사정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과연 하루에 얼마나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시간에 강한 인상을 주지 않으면 언제 내릴지도 모르는 바쁜 버스 승객이 누가 귀를 기울여주겠어'란 예상대로 승객들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끈질기게 자신이 만든 양말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했다. 실이 가볍고 가늘어 단 몇 그램의 실을 늘여 빼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런 실을 사용해 고급 기계로 짜냈기 때문에 국내 최고 수준의 제품이라고 주장했다.

무려 20분 가까이 이어진 신사의 '연설'이 마침내 끝났다. 큰 목소리로 제품의 성능을 과대 선전하는 버스나 지하철 외판원들과 사뭇 다른 그의 방식이 어떻게 먹혀들까 궁금했다. 하나라도 팔리기나 할까. 한 명, 두 명 그를 외면했다. 그보다 내가 더 조급해졌다. 그 때 마음씨 좋게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주섬주섬 지갑에서 5000원짜리를 꺼내 5개들이 한 묶음을 샀다.

그리고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승객들이 너도 나도 양말을 사는 것이다. 일곱 묶음이나 팔렸다. 그는 종로구 신문로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내렸는데 마침 함께 하차한 주부 두 명이 각각 1만 원을 건네고 두 묶음씩 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총 열한 묶음을 팔아 5만5000원의 수입을 올렸다. 일반적인 마케팅 상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돌이켜봤다. 그는 제품의 탄생배경을 이야기로 꾸미고, 품질의 우수성을 차분하고 진실되게 설명했다. 분명 스토리 골격은 여느 외판원과 같았지만 좀 더 탄탄한 스토리를 구성하고 오랜 시간 정성들인 설명으로 신뢰를 주면서 그는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업들은 항상 바쁘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세상이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풀어내려 한다. 물론 이 방식이 먹히는 때도 많다. 하지만 생명력이 긴 상품을 만들고 싶다거나 명품의 반열에 오르려면 디자인과 품질은 기본이고 진솔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호흡이 긴 '스토리 텔링'이 필요하다. 세계적으로 명품 대접을 받는 상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스토리'를 갖고 있다.

석동빈 산업부 차장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