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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헌법재판소 백송 그늘 아래서

입력 | 2011-04-23 03:00:00

피의 역사 머금은 의연한 자태




화창한 봄날, 백송(白松)을 보기 위해 서울 북촌의 헌법재판소를 찾았다. 소나무도 세분하면 여러 종류가 있다. 백송이란 말 그대로 껍질이 하얀 소나무다.

정문을 통과하며 용건을 말하자, 경비 아저씨는 인사 대신 “조용히 보고 오세요”라고 짧은 말을 건넨다. 건물을 돌아서자 작은 언덕 위에 우람한 모습의 백송이 서 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백송은 10년에 겨우 50cm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100살만 넘어도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귀한 취급을 받는다. 헌법재판소의 백송(천연기념물)은 국내에 현존하는 같은 종류의 나무 중 가장 아름다운 개체다. 수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을 펴 든다.

나무는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꾸는 동안 파란만장한 장면도 많이 지켜봤을 것이다. 600년 동안 보았던 역사 속 인물을 늘어놓으라고 하면 끝도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을 것 같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앉은 자리에 살았던,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홍영식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으리라.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의 둘째아들로, 18세에 과거에 급제한 영재였다. 너무 어렸던지라 급제 후 2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란 일종의 ‘공부 휴가’를 거친 후에 관직에 나섰다. 후에도 내내 초고속 출셋길을 달렸다.

홍영식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고, 김옥균, 박영효 등과 교유하며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그와 박규수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다. 결국 홍영식은 1884년 10월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하지만 일본을 등에 업고 위로부터 시도된 급진적 개혁은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의 배신으로 3일 천하란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홍영식은 주위의 망명 권유도 뿌리친 채 왕의 곁에 남았다가 청나라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광혜원이 된 홍영식의 집은 1987년 연세대학교 캠퍼스 안에 복원됐다.

이후 홍영식의 집은 광혜원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됐다. 광혜원은 아이러니하게도 갑신정변 때 개화파의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수구파 민영익(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의 돈으로 세워졌다. 민영익은 서양 의학으로 자신을 살려낸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앨런에게 거금을 희사해 근대식 병원 설립에 힘을 보탰다. 광혜원이 설립된 때는 1885년 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지 불과 몇 달 후였다.

백송은 이 자리에 서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을 보아 온 걸까. 앞으로는 어떤 사건들이 이곳에서 펼쳐질까. 세월이 흘러 더욱 멋진 수형으로 자라 미래를 맞이할 백송이 기분 좋고 평화로운 추억들만 잔뜩 간직하게 되길 소망해 보며, 스케치북을 접었다.

다시 보러 올게. 그 때까지 안녕!
너의 긴 삶 속에 잠시 스쳐가는 짧은 인사.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 일러스트레이터 이장희 입니다
빠른 세상선 느림이 귀한 법이죠


안녕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 이장희입니다. 오늘부터 매주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을 연재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고,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한 약간 엉뚱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때 낙서를 많이 해서 어른들께 꾸중을 듣곤 했습니다. 친구와 국제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다 유럽으로 가려던 스케치 여행 계획을 즉흥적으로 미국 일주로 바꾸기도 했지요.

저는 예전부터 풍경을 스케치로 그려왔습니다. 스케치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느림, 더 나아가 멈춤의 미학’입니다. 같은 곳이라 해도 자동차를 타고 지나는 기분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기분, 그리고 멈춰 서서 느끼는 기분은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멈춘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지요. 바쁜 삶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시간의 물결을 말입니다. 멈추면 보통 때와 다른 것이 보이고, 다양한 느낌이 생겨납니다.

조카와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가방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현란한 서울의 불빛들이 감춰버린 희미한 밤하늘의 별을 보았습니다. 함께 이어폰 속 음악을 몇 곡 듣고,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삼촌, 왜 어른들은 시간이 빠르다고 하는 거죠?”

한해가 끝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였습니다. 정말 빠른 시간! 어른의 시간은 왜 그렇게 빠르게 흐르는 걸까요?

오늘도 스케치북을 펴고 그림을 그립니다. 시간과 환경이 만들어 주는 순간의 향연은 그림을 통해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됩니다. 그림을 그리면 풍경의 새로운 의미가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느림, 그리고 멈춤의 미학입니다.


이장희 도시공학을 전공했고, 미국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각종 매체에 일러스트와 사진, 칼럼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뉴욕’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를 만나다’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