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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허승호]오류에 쉬 빠지는 인간

입력 | 2011-03-23 20:00:00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우범지역에는 순찰경찰도 당연히 많다. 이 통계를 토대로 ‘경찰 수가 늘수록 범죄가 증가한다’고 추론하면서 “경찰밀도를 줄이자”고 주장한다면? 인과관계를 거꾸로 적용한 오류(reverse causation)다.

담배를 피우려면 성냥이 필요하다. 또 담배를 즐기면 폐암에 걸리기 쉽다. 성냥 소비와 폐암 발병률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폐암 퇴치를 위한 성냥소비절약 캠페인’을 펼친다면? 흡연이라는 ‘제3의 근본원인’을 못 본 착시다.

가계부채, 새로운 위기의 복병

이 같은 상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과관계를 혼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정책 등 좀 전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면 인간은 잘못된 추론에 쉬 빠지곤 한다. 예컨대 파생금융상품의 복잡함 때문에 과도한 차입의 위험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 ‘파생기법이 위험을 중화시켰다’고 오인할 수 있다. 저금리로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뛸 때 ‘IT혁명이 가져온 생산성 향상으로 호황이 지속되고 있다’고 오판한다면 상황을 그냥 방치하게 된다.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출발이었다.

이처럼 상황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 정보가 충분치 않은데도 하루하루 정책을 선택해야 하는 당국은 더 그렇다. 하지만 변치 않는 철칙(鐵則)도 있다. 앞당겨 즐긴 성장은 훗날 침체를 더욱 깊게 하며, 억지로 눌러둔 물가는 머잖아 터진다는 것이다.

경제 당국자들은 “민생을 고려할 때 물가보다는 일자리가 훨씬 중요하다”면서 팽창을 택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팽창이 지속되면 물가뿐 아니라 기업-은행-가계의 부실이 함께 부푼다. 누적된 거품이 마침내 터지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서민이다. 조금만 길게 보면 민생 죽이는 일이다. 여러 번 겪지 않았는가?

시장이 흥청망청할 때 견제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한국은행과 금융위원회는 그 일 하라고 존재한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렵 술병 치우기가 이들의 몫이다. 물론 아무도 안 좋아한다. 때론 공적(公敵)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해야 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 몫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 부실 저축은행과 건설사, 경쟁력 잃은 중소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한참 늦었다. 물가 대응은 늦었을 뿐 아니라 지금 하는 것조차 억지와 편법 일색이다.

진짜 문제는 부풀 대로 부푼 가계부채다. 작년 9월 말 현재 가계 빚 규모는 770조 원으로 가처분소득의 1.4배를 넘어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최대 골칫거리가 됐다. 금융위기 당시의 미국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비율을 훌쩍 넘는 수준이다. 돈과 환율을 넉넉히 풀자 부동산이 꿈틀댔고 너나없이 은행 빚을 내 아파트를 산 후과다. 이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러면 이자 부담에 쓰러지는 가계가 속출한다. 은행도 부실채권 직격탄을 맞는다. 새로운 금융위기의 복병이다. 사실 문제가 지나치게 곪아 마땅한 해법도 보이지 않는다.

옛날식 정책, 힘 빠진 시장원리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제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는 부동산이 아니라 금융건전성을 위한 제도다. DTI를 부활시키겠다”고 밝혔다. 가계 빚을 잡기 위한 조치다. 올바른 접근이다. 그런데 작년 8·29부동산대책 때는 왜 DTI를 완화했나. 그때는 DTI가 금융건전성제도라는 사실을 몰랐는가.

2008년 금융위기를 한국이 남보다 덜 힘들게 넘어온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은행-기업의 건전성을 높여놓은 덕분이다. 또 당장 눈앞의 효과는 미지근하더라도 시장원리를 존중하는 쪽으로 뚜벅뚜벅 정책이 진화해온 결과다. 그런데 2008년 이후엔 정책이 하나둘 옛날식으로 후퇴하면서 새로운 위기의 싹을 키워온 것 같다. 숨이 넘어가는 국면에서야 돈 보따리를 풀 수밖에 없었지만 그 단맛에 너무 오랫동안 취해 있었다.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정도(正道)와 원칙으로 복귀해 고통을 감내하는 수밖에….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