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베이스볼 피플] 오봉옥 “고향 제주서 최고 프로선수 길러낼 겁니다”

입력 | 2011-03-15 07:00:00

바다 향해 돌멩이 던지던 제주 소년…뭍 텃세 이기고 퍼펙트 승률왕 차지…은퇴 후 고향 찾아 지도자 제2 인생



“뭍에 안가도 야구 잘 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제주 출신 1호 프로야구 선수인 오봉옥 제주제일중 감독은 고향에서 제주 태생의 프로선수를 키워내기 위해 땀을 쏟고 있다. 삼성에서 시작해 쌍방울∼해태∼KIA∼한화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2000년 제주 오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도 당당히 출전했고, 카메라 앞에서 제주의 상징인 밀감을 먹는 포즈를 취하며 제주를 홍보하기도 했다.제주|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스포츠동아DB


제주도 1호 프로야구 선수 ‘돌직구’ 신화 오봉옥 의 제주 사랑

12∼13일까지 제주오라구장에서 열린 KIA-넥센의 시범경기에는 이틀 동안 1만3000여명의 관중이 몰렸다. 관중석에 두 팀은 물론 롯데·두산 등 각 구단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마치 특정구단이 아닌 ‘야구자체’를 응원하는 듯….

제주에는 현재 초등학교 2개, 중·고등학교 각각 1개, 대학 3개 팀이 있다. 여전히 부족한 숫자지만, 말 그대로 ‘불모지’이던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황량한 저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지켜나갔던 야구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다. 13일 오라구장에서 ‘제주출신 1호 프로야구 선수’인 오봉옥(43) 제주제일중학교 감독을 만났다.

○돌멩이와 밀감으로 단련된 ‘돌 직구’

30년 전. 제주에서도 한적한 곳으로 꼽히는 남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년은 틈만 나면 바닷가로 향했다. 그리고 ‘저 푸른 해원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꿈을 담은 돌멩이는 하루가 다르게 더 먼 바다 쪽을 향했다.

‘돌 직구’의 탄생신화는 이렇게 첫 페이지를 연다. “돌 뿐만 아니라, 밀감도 많이 던졌어요. 우리 집이 밀감 농사를 지었거든…. 상품으로 못 파는 밀감들은 다 내 손에 있었지요. 동그란 것을 찾다보니….”

1980년대 OB 베어스가 서귀포로 전지훈련을 왔다. 김우열 등 당대의 스타들을 엿보기 위해 소년도 서귀포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사소한 동작도 멋있었고, 유니폼에서는 윤이 나는 듯 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은데….’ 돌과 밀감으로 단련된 어깨. 하지만 제주 땅에는 그 어깨를 쓸 만한 곳이 없었다.

오봉옥. 스포츠동아DB.

○뭍사람들도 깜짝 놀란 제주소년의 어깨

뭍으로 간 고1 수학여행. 포항제철 견학도 예정돼 있었다. 직감적으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교감선생님을 찾아가 포철공고 야구부 입단테스를 받게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겨우 포철공고의 승낙을 얻었다. “공을 던져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있는 힘껏 던졌지요. 그랬더니 이쪽 축구골대에서 저쪽 골대까지 날아가더라고. 한 100m 쯤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정식선수가 됐다.

하지만 타지생활은 쉽지 않았다. “촌놈 중의 촌놈 이었으니까. 텃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요. 사투리 때문에 오해도 많이 생기고…. 한번은 ‘아니우다(아닙니다)’라고 말했다가 선배들에게 건방지다고 혼나기도 했어요.” 외로운 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손에 들린 야구공이었다. 한 때 돌멩이가, 밀감이 그랬던 것처럼….

제주오라구장에서 오봉옥. 스포츠동아DB.

○우여곡절 끝 프로 입단 ‘퍼펙트 승률왕’이 되기까지

오 감독은 이후 영남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 도중 현역으로 군입대 했다. 30개월을 꼬박 채운 뒤 제주에서 밀감농사를 돕고 있을 때의 일이다. 스포츠신문 한 귀퉁이의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삼성 라이온즈 입단 테스트 공고.’ 그 길로 짐을 쌌다.

“딱 3일을 운동하고 갔어요. 3년 가까이 운동을 쉬었는데 구속을 보고 나도 놀랐지요. 137∼138km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결국 1991년 12월 정식계약을 맺었다.

당시 삼성 사령탑은 김성근(SK) 감독. 훈련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잠들기 직전까지는 뛰는 시간 아니면, 던지는 시간이었어요. 어떤 날은 하루에 공 1000개도 던졌지요. (그게 가능하냐고 재차 묻자) 정말 1000개요.”

마침내 기회가 왔다. 1992년 4월이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올라갔거든요. 그런데 팀이 역전을 하는 거예요. 다음 경기에도 그렇게 승리를 챙겼지요.” 징크스를 중시하는 김성근 감독은 오봉옥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저도 징크스가 있어요. 뒷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을 넣어두면 야구가 잘 되는 거예요. 그 얘기가 알려지면서 500원 짜리 동전을 던져주는 팬들이 많아졌어요. 그런 팬 중에 유독 제주사투리를 쓰시는 분들이 많았지요. 어떤 때는 수십 만원 씩 모이기도 했어요.”

당시 삼성투수코치였던 권영호 영남대 감독은 “김상엽과 오봉옥, 이 두 명의 투수들은 직구가 묵직한 대표적인 선수였다”고 회상했다. 결국 오 감독은 돌직구의 힘으로 13승 무패의 퍼펙트 승률왕이 됐다. 100% 승률왕은 프로야구 사상 오봉옥과 김현욱(2002년) 둘 뿐이다.

“유망주들 육지 가려고 할 때 속 상해
이젠 이곳도 야구 충분히 할 수 있어
책임지고 재목감 키우는 꿈 새록새록”

제주오라구장에서 오봉옥. 스포츠동아DB.


○제주 출신의, 제주에서 육성한 프로선수 만들겠다

쌍방울과 KIA∼한화를 거쳐 2006년을 끝으로 은퇴한 오 감독은 2007년 제일중학교 지휘봉을 잡았다. 제주 태생으로, 제주에서 키워낸 프로선수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기 때문이다. “저도 학교를 뭍에서 나왔고, (강)민호(롯데)도 마찬가지고…. (반대로 롯데 김수완과 넥센 김성현은 고등학교 때 제주로 왔다.)

지금도 유망주들이 육지로 가려고 할 때 많이 속상합니다. 이제 여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제가 책임지고 해보려고요. 유망주들은 많아요. 투포환을 했던 190cm의 중3선수가 있는데 오라구장에서 홈런도 쳤다니까요.”

사진촬영을 위해 관중석으로 올라갔더니, 많은 팬들이 오 감독을 알아봤다. 아직 제주학생야구는 주요 전국대회의 상위입상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가 돌멩이를 던지던 시절보다는 여건이 많이 나아졌다. 그래서 “제주에서 프로 최고의 선수를 키워내겠다”는 말도 꿈만은 아니다. ‘돌하르방’같이 불펜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오 감독의 핸드폰 통화연결음악은 제주색이 짙은 ‘감수광’이다.제주|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