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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바늘이 절로 그리고, 실이 절로 채색하는···

입력 | 2011-03-04 03:00:00

5000여점의 작품엔 ‘忍苦의 삶’이 오롯이




①수 문살문 자수. ②금은사 단호흉배 자수. ③서울 대모산 숲길 자수. ④손인숙 씨(가운데)가 임권택 감독(왼쪽) 등 손님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⑤‘섭리’ 시리즈. ⑥신윤복 미인도 자수. ⑦격자매화 꽃살문·빗살문 자수. ⑧문살 수 보자기 자수. ⑨전등사 대웅보전 안쪽 공포 자수 . ⑩손인숙 씨가 지난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맞아 만든 G20 국기 자수.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그는 자수 작업에 협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자수, 조각, 옻칠 등 그가 ‘지휘’하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장인이 수십 명이다. 그래서 작품의 틀인 액자에도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왜 프레임(틀)은 ‘엑스트라’여야만 하나요? 엑스트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잖아요.”

인천 강화군 전등사 대웅보전 닫집봉황(보물 178호)을 수놓은 작품은 호두기름을 바른 나무 액자에도 조각을 한 뒤 수를 놓았다. 액자에 수를 놓은 것이다. 한국 전통 가옥의 창 이미지로 꾸민 액자, 물푸레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그대로 살린 액자도 있다.

‘화성능행도’(보물 1430호)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행차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손 씨는 이 그림을 자수로 재현하면서 그림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을 매듭 장식으로 따로 만들어 나무 액자 옆에 매달았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 인물들이 액자를 뚫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 자수로 알리는 한국 문화

평생 작품을 판 적이 없다는 그는 청와대와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일부 작품만 기증을 해 왔다. 올해 5월엔 지인의 소개로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국회의사당, 국무부에 그의 자수 작품들을 기증할 예정이란다. 우리의 소중한 국보와 보물, 고서화가 자수로 거듭나 미국 정가의 심장부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손 씨는 “오랜 세월 수놓는 고통을 벗 삼아 즐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195m²(약 59평) 아파트 두 채, 경기 용인시 죽전의 294m²(약 89평) 아파트 두 채 등 총 네 채의 아파트에 작품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인 수십 명을 움직이며 마음껏 자수 작업을 해왔던 데엔 알고 보니 남다른 ‘외조’도 있었다. “남편이 수원극장 등 여러 사업체를 갖고 있어요.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제 자수 작업엔 ‘노터치’였죠. 그동안 수백억 원의 돈을 한국의 문화로 바꿔왔다고 보시면 돼요.”

손 씨의 자수 인생은 교사였던 어머니 이경수 씨의 영향이 컸다. 솜씨 좋던 어머니의 자수를 열 살 때부터 어깨 너머로 배우고 자란 것이다. 그의 자수를 성장시킨 건 뜻밖에도 역경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졌다. 이화여대 시절 유복한 학생들이 내다버린 실을 주워와 서울 미아리 단칸방에서 밤새 손으로 꼬았다. 전통자수는 꼬아 만든 실인 ‘꼰사’를 주로 사용한다. 자수과 수업시간 다른 학생들이 실을 꼬는 동안 그는 이미 집에서 만들어온 꼰사로 남들보다 빨리 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힘겨웠던 날들을 떠올리며 평생 승용차를 산 적이 없다. 그의 남편도 수년 전 업무용 차를 처분했다. 최근 결혼한 큰딸은 부모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손수 간소한 혼수를 장만했다고 한다. 버는 돈은 오로지 자수 작업에만 썼고, 두 딸도 이런 부모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독립적으로 자랐다는 게 손 씨의 설명이다.

손 씨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자수박물관을 세우려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 갖게 된 소망이다. “제대로 숲을 이뤄 놓으면 호랑이가 찾아오지요. 젊은 세대들이 누구나 박물관을 찾아와 우리 문화를 누렸으면 합니다. 고통을 즐길수록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내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삶이야말로 ‘넉넉한 가난함’ 아닐까요?”

임권택 감독이 손 씨의 집을 찾아와 남긴 방명록 내용은 이랬다. “놀랍습니다. ‘화석이 돼 가는구나’ 개탄했던 우리의 자수문화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네요. 큰 존경을 보냅니다.”

불타 버린 숭례문의 단청이 그의 집엔 있다. 그가 10년 전 만든 자수다. 그동안 우리는 남의 나라 명품, 남의 나라 장인만 떠받들진 않았나. 고통을 즐겼다는 손 씨의 자수 한 땀 한 땀에 쓸쓸한 외로움은 없었나. 그의 집을 나서면서 불현듯 미안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