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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탕 크기 슈퍼컴? IBM의 무한상상 15년내 현실로

입력 | 2011-02-26 03:00:00

IBM 1911∼2011…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16일(현지 시간) 미국 퀴즈쇼 제퍼디는 사람과 컴퓨터의 퀴즈대결 특별방송을 내보냈다. 이날의 승자는 컴퓨터 왓슨. 왼쪽부터 제퍼디에서 74연승을 한 켄 제닝스씨, 우승한 캄퓨터 왓슨, 제닝스 씨의 75연승을 저지했던 브래드 리터씨(위). 퀴즈쇼 무대 뒤의 실제 왓슨 모습. 냉장고 10대 크기다. 무대 위 왓슨은 사람 사이에 세워두기 위해 만든 아바타다.(아래)

“정말 즐거웠습니다. 한 번 더 대결을 해도 가슴이 뛸 겁니다. 내가 미래의 일부가 된 느낌이었어요.”

한국에 ‘퀴즈 대한민국’이 있듯 미국에는 1964년부터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는 ‘제퍼디(Jeopardy)’라는 퀴즈쇼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74연승을 올려 유명해진 미국의 ‘퀴즈 왕’ 켄 제닝스 씨는 16일(현지 시간) 제퍼디 특별방송을 마치고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 컴퓨터 ‘왓슨’과의 대결에서 완패한 뒤였다. 이날 제퍼디에는 제닝스 씨의 75연승을 저지했던 브래드 러터 씨도 함께 출연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퀴즈 천재도 컴퓨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들이 3일간 벌인 퀴즈 3차전이 끝나자 상금의 액수는 제닝스 씨가 2만4000달러(약 2712만 원), 러터 씨가 2만1600달러로 둘의 상금을 합해도 1위인 왓슨의 상금(7만7147달러)에 턱없이 모자랐다.

○ IBM 100년

왓슨의 승리에 전 세계 정보기술(IT) 업계가 들떴다. 왓슨은 이전까지의 컴퓨터와는 달리 스스로 학습하고, 지식을 재구성해 복잡하고 미묘한 제퍼디 퀴즈쇼의 질문에 적응하는 법까지 배우는 컴퓨터였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여기까지 발전하는 데 100년이 걸렸다.

왓슨을 만든 IBM은 1911년 6월 16일 근로자의 근태를 기록하는 ‘펀치(천공카드)’ 시스템 제조업체로 미국 동부 뉴욕에서 문을 열었다. IBM은 ‘국제사업기계(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를 뜻한다. 지나치게 특징 없고 무미건조한 이름이라 그저 머리글자를 딴 IBM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56년 이 회사는 스스로 정보를 습득하는 초기 단계의 인공지능 기계를 최초로 선보였고, 1966년에는 지금까지도 메모리반도체 기술에 주로 사용되는 DRAM 기술을 개발했다. IBM의 직원들은 근무하는 동안 노벨상을 5차례 받았으며 ‘컴퓨터 분야의 노벨상’으로 유명한 튜링상도 4차례 수상했다. 이 회사의 역사가 곧 컴퓨터 발전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이 회사의 최신 기술이 집대성된 슈퍼컴퓨터 왓슨에도 약점은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크다는 게 문제. 냉장고 10대 크기에 맞먹는 왓슨은 한번 이동하려면 실내 공사를 벌여야 한다. 그래서 최근 IBM은 슈퍼컴퓨터의 크기를 줄이는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엄청난 전력 소모도 문제다. 고성능 프로세서(처리장치)가 작동할 때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지나면서 전기 저항 때문에 엄청난 열이 발생하는데 이를 식히기 위한 냉각장치가 전기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IBM 취리히연구소가 개발한 아쿠아사르(Aquasar) 수랭식 컴퓨터. 냉각수가 컴퓨터 사이를 돌면서 열을 식히기 때문에 공기가 통할 넓은 공간이 필요없어 컴퓨터 크기를 대폭 줄일 수 있다.

○ 컴퓨터의 미래

지난해 11월 IBM 스위스 취리히 연구소에서 만난 브뤼노 미셸 박사는 좀 특이하게 생긴 컴퓨터를 기자에게 보여줬다. ‘아쿠아사르(Aquasar)’라는 이 컴퓨터는 일반적인 컴퓨터보다 두께가 5분의 1 정도로 얇았다. 모든 컴퓨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냉각 팬’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IT활용 의학 분야도 진출… “IBM 경쟁력은 과감한 R&D” ▼

미셸 박사는 “아쿠아사르는 냉각 팬 대신 모세파이프를 이용해 컴퓨터 회로 구석구석으로 냉각수를 보내 열을 낮춘다”고 말했다. 마치 자동차의 수랭식 라디에이터와 같은 원리다. 지금까지 전자기계와 물은 상극이라는 통념이 있었지만 발상을 바꿨더니 큰 변화가 가능했다. 이 덕분에 지금까지 부피를 많이 차지하지만 냉각을 위해 컴퓨터에 꼭 필요했던 공기가 통하는 공간도 필요 없게 됐고 전력 소모도 줄어들었다.

그는 이와 함께 그동안 2차원 평면에 이러저러한 반도체를 꽂아 만들던 중앙처리장치(CPU)를 탑처럼 3차원으로 쌓아올리는 새로운 기술도 보여줬다. 나노미터(nm·1nm는 10억분의 1m) 단위의 회로를 쌓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층으로 쌓았다고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기존 CPU와 두께 차이가 거의 없다. 미셸 박사는 “이런 기술을 이용하면 앞으로 15년 이내에 지금의 슈퍼컴퓨터가 각설탕 한 개 크기로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회로를 겹겹이 쌓아 입체적으로 만들어 기존보다 크기는 줄이고 성능은 향상시킨 프로세서. 발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냉각수가 모세관을 타고 회로 사이를 흐른다. 사진은 각설탕과 크기를 비교한 모습.

○ 보조기술의 발전

최근 IBM의 연구는 컴퓨터만이 아니라 컴퓨터와 관련된 다른 기술영역을 넘나든다. 대표적인 것이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의학 분야 연구다. 특히 ‘랩온어칩(Lab on a Chip)’이라고 불리는 기술은 ‘칩 위의 실험실’이라는 뜻처럼 기존에 실험실에서 진행해야 했던 다양한 테스트를 작은 반도체칩 위에서 모두 진행하도록 돕는다.

IBM 취리히연구소의 에마뉘엘 들라마르슈 박사는 최근 수년 동안 이 분야의 연구를 진행해온 전문가다. 그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들어 보이며 “이것이 병원 검진실의 컴퓨터 한 대가 처리하는 업무를 혼자 맡아서 하는 장치”라고 말했다. 나노기술을 이용해 미세한 회로를 플라스틱 위에 인쇄한 뒤 그 위에 혈액을 떨어뜨리면 모세관 현상으로 혈액이 회로 사이를 흘러가면서 건강검진이 이뤄지는 것이다. 혈액이 흐르는 힘을 동력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별도의 전원도 필요 없다. 매우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잉크와 플라스틱 값 외에는 재료비가 들지 않아 한 번 기술을 개발하면 ‘1회용 컴퓨터’처럼 사용할 수 있다.

○ 9개의 연구소

IBM은 현재 이런 연구소를 세계 9개 지역에 보유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왓슨연구소가 연구개발(R&D)의 본부 역할을 하며 실리콘밸리의 알마덴연구소, 텍사스의 오스틴연구소 등 미국에 3개의 연구소가 있다. 이 밖에 중국과 일본, 인도와 이스라엘, 브라질과 스위스에도 연구소가 있다. 각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유기적으로 공유된다.

비즈니스 데이터 실시간으로 분석 IBM의 스위스 취리히연구소가 개발한 실시간 비즈니스 데이터 분석 도구를 쓰는 모습. 이 도구는 시장의 수많은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해 기업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정보로 만들어 준다. IBM 제공

예를 들어 최근 이스라엘의 하이파연구소가 진행하고 있는 ‘임팩트’라는 연구는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유럽 각국 도서관의 고서(古書)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이다. 하이파연구소는 육안으로도 읽기 힘든 옛 활판 인쇄 문서를 스캔해 현대 문자로 변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기존의 문자인식 기술로는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IBM 연구소들이 진행해온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을 빌렸다. 거대한 중앙컴퓨터에 유럽의 고서 전문가들이 접속해 스캔된 문서를 원하는 만큼 읽어 현대어로 입력하는 식이다. 전문가들이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작업하면 하이파 연구진이 만든 프로그램이 이를 취합해 문서를 해독한다.

IBM은 또 최근 18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출원하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지난해 IBM이 미국에서 출원한 특허는 5896건. 단일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연간 5000건을 넘는 특허를 출원했다.

뉴욕 왓슨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연구원 류경동 박사는 “최근 기업들은 당장 상업화가 가능한 기술을 제외하고는 R&D를 점점 꺼리는 추세”라며 “IBM의 경쟁력은 이들과 달리 먼 미래를 바라보는 과감한 R&D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