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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연평도 포격 도발]포격 이틀후… 절망의 섬 연평도 가보니

입력 | 2010-11-26 03:00:00

“北 볼모노릇 지긋지긋”… 사람의 자취 사라진 ‘텅빈 유령섬’




23일 북한의 포격 도발로 전면 통제됐던 인천과 연평도를 잇는 뱃길이 이틀 만인 25일 다시 열렸다. 북한의 포격을 피해 서둘러 몸만 빠져나온 연평도 주민들이 이날 귀중품과 옷가지 등을 챙기러 연평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려고속훼리㈜ 소속 코리아익스프레스호에 오르고 있다. 연평도=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난 뒤 출입이 통제됐던 연평도 뱃길이 사흘 만인 25일 다시 열리자 황망히 고향을 등졌던 주민 250여 명은 이날 고향으로 가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낮 12시 반 인천 연안부두를 출발한 여객선에서 임경희 씨(51·여)는 오후 3시 반 연평도 당섬 선착장에 도착할 때까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멀리 섬이 보이자 임 씨는 “우리 집은 괜찮을까”라며 혼잣말을 하다 처참한 섬 모습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쌀과 밥솥, 겨울옷을 챙겼다. 신문지에 둘둘 만 밥솥과 쌀 한 포대를 조그만 손수레에 싣고 집을 나섰다. “이제 아무 미련도 없어요. 당분간은 옹진군에서 마련해 준 인천의 찜질방에 머물다가 육지에 정착할 생각입니다.” 이날 연평도를 다시 찾은 주민들은 두 시간 남짓 서둘러 옷가지 등을 챙긴 후 남아 있던 다른 150여 명의 주민과 함께 섬을 떠났다. 이들이 떠난 연평도는 ‘빈 섬’이 됐다.

○ 텅 빈 연평도


연평도에서 태어난 박노근 씨(70)는 포격 첫날인 23일 어선을 타고 탈출했다. 그는 서릿장 같은 바닷바람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박 씨는 “내일이라도 돌아오면 좋겠지만 이젠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며 “고향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주민들은 28일 서해에서 실시하는 한미 연합훈련과 관련해 북측의 또 다른 도발이 있을까 봐 걱정했다. 연평마트 주인 차태정 씨(39)는 “고향을 지키려고 지금껏 살았지만 곧 다가올 훈련은 너무 두렵다”며 “슈퍼마켓 물건들은 모두 군인들에게 주고 당분간 이 섬에서 떠나 있을 생각”이라고 했다. 주민 김성진 씨(45)는 “연평도 주민은 모두 북한에 볼모로 잡혀 있는 느낌”이라며 “이제 볼모 노릇도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탈출한 이틀 동안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이날 남아 있던 150여 명의 주민이 떠나면서 군인과 공무원 등을 제외한 연평도 주민은 50여 명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연평도 주민대책위 측은 “남겠다는 20여 명 말고는 모두 섬을 떠났다”고 밝혔다.

○ 고스란히 남은 상흔…그래도 복구는 계속

포격 이틀이 지난 25일에도 연평도 골목 구석구석은 타다 남은 냄새가 진동했다. 특히 주택이 몰려 있는 연평면 167번 길에서는 10채가 넘는 집이 전소돼 숯덩이가 됐다. 지붕 위로 포탄이 떨어진 집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다. 한 슈퍼마켓은 새까맣게 탄 술병들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이 떠난 골목에는 주인 잃은 개들이 서너 마리씩 떼 지어 먹이를 찾아다녔다.

포격 흔적도 곳곳에 선명하게 남았다. 연평파출소 부근 포탄이 떨어진 공터 바닥은 20∼30cm 깊이의 구멍이 파여 있었다. 폭발 지점 옆에 세워져 있던 빨간색 소형승용차는 뒤집혀 전소됐고, 맞은편 건물 외벽은 수백 개의 파편 흔적으로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해병대 연평부대에서도 부대 뒤편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K-9 포진지 내 높이 5m가량의 콘크리트 벽이 포탄의 충격으로 가운데가 반경 1m, 깊이 30cm가량 깎여 나갔다. 주변 벽과 바닥까지도 포탄 파편으로 움푹 파인 곳이 셀 수 없이 많았고 곳곳에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이날 연평도에는 TV 소리도,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도 사라져 저공비행하는 헬기의 굉음만이 온 섬을 뒤덮었다. 주민 유명복 씨(73)는 “이제 사람마저 떠나버리면 연평도가 정말 ‘유령섬’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쓰러진 마을을 다시 일으키려는 복구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재해구호협회 소속 자원봉사자 30여 명은 연평도 주민들을 위한 임시 가옥을 짓고 있었다. 연평초등학교에 설치될 임시 가옥은 총 15채로 이르면 주말에 완공된다. KT와 한국전력 등의 작업으로 이날 섬의 전력과 유무선 전화는 대부분 복구됐다.

연평도=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 “통장 대신 이웃들 덮을 이불 30채 챙겼어요” ▼
배로 주민 63명 ‘연평도 엑소더스’ 도운 유대근씨


23일은 어머니의 쉰 두 번째 생신이었다. 유대근 씨(32·사진)는 이날 오후 2시 30분 연평도 나루에 나가 여객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섬에 들어오는 지인 편에 생일 케이크를 하나 부탁해 둔 터였다. “콰콰 쾅….” 별안간 마을 쪽에서 귀를 찢는 굉음이 들려왔다. 쉴 새 없이 퍼붓던 포격을 뒤로하고 방공호에 몸을 숨겼던 유 씨는 두 차례의 포격이 그치자 서둘러 나루로 달려갔다. ‘탈출하려는’ 주민들이 탈 배를 구하려고 몰려들었다. 오후 5시 18분 유 씨는 자기 이름을 딴 배 ‘대근호’를 이끌고 예정에 없던 출항을 했다. 9.77t짜리 꽃게잡이 배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평소 선장과 다섯 명의 선원이 타던 배에 부모와 아내, 외할머니를 포함해 63명의 연평도 주민을 가득 태웠다. 대근호는 이날 연평도를 빠져나온 고깃배 중에 가장 많은 주민을 실은 배였다. 비좁은 배 안에서 주민들은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야 했다. 남자는 맞바람을 맞아야 하는 뱃머리에 등지고 앉았고, 여자는 바람이 약한 배 뒤쪽에 앉았다. 6, 7세 아이 서너 명은 조타실 뒤편 사방에 바람막이를 쳐놓은 공간에 앉혔다. 유 씨는 통장 하나 못 챙겨 나왔지만 뱃길이 추울 것에 대비해 친척들까지 동원해 이불 30여 채를 짊어지고 나왔다. 자박자박하게 바닷물이 스며든 배 바닥에 가져온 이불을 깔았다. 두 사람이 이불 하나로 반은 바닥에 깔고 반은 덮었다. 노인들은 머리 위로 이불을 한 채 더 뒤집어써 배 안으로 튀는 파도를 막았다.

연평도에서 인천 연안부두로 가는 내내 대근호에는 적막이 흘렀다. 북한의 포탄에 맞아 연기 자욱한 고향 섬을 뒤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날아오는 포탄을 맞을까 봐 무서워서였다. 컴컴한 바다를 가르고 오는 동안 등대 불빛이라도 번쩍하면 배에 탄 주민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배에 켜둔 불빛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다며 불을 끄고 가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두운 바다에서 길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처럼 길게 느껴진 3시간 40여 분 만에 저 멀리 인천 연안부두가 보였다. 대근호에 몸을 맡기고 ‘보트피플’처럼 섬을 떠나온 63명의 연평도 주민은 누구 할 것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평도에 사는 것으로 애국하고 있다’고 자부해온 연평도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이불을 덮어주며 ‘전쟁터’에서 생환했다.

인천=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 “주민 1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떠날순 없죠”
‘연평도 지킴이’ 김운한 경위-신효근 소방사-박성철 공보의


“주민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끝까지 연평도를 지킵니다.”

인천해양경찰서 연평파출소장 김운한 경위(57)는 25일에도 북한 측의 기습 도발로 폐허가 된 마을을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공포에 질린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졌지만 연평도에서는 김 경위처럼 묵묵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연평도 지킴이’들을 만날 수 있다.

김 경위는 이틀째 한두 시간 쪽잠을 자면서 화재를 진압하고 쑥대밭이 된 마을을 복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평도에서 1년 6개월째 근무 중인 김 경위는 “북한의 도발로 집에 안부 전화도 못할 정도로 바빴지만 이곳에서 살아갈 주민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라며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일 뿐 칭찬받을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연평도에서 나고 자란 신효근 소방사(38)는 이날도 추가 사상자 수색 작업을 벌였다. 신 소방사는 인천 중부소방서 소속 연평 119지역대에서 13년째 일하고 있다. 처음 포격이 시작됐을 당시 119 상황실에 맨 먼저 상황을 알린 것도 그였다. 그는 1차 포격 직후부터 연평도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의용소방대원 30여 명과 함께 섬 곳곳에 난 산불 진화 작업에 나섰다. 이날 오후에도 강한 바닷바람에 산불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신 소방사는 어김없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신 소방사의 가족 모두 연평도에 살고 있었지만 아내와 세 자녀는 24일 오전 인천으로 떠났다. 그는 “진화 작업 중에도 포격이 이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계속 뛰어왔다”고 했다.

중부리 경로당에 차려진 임시 진료소에선 공중보건의 박성철 씨(30)가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박 씨는 23일 포격으로 연평면 보건지소가 타격을 입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응급환자들을 치료했다. 박 씨는 “평소 많게는 70여 명을 진료했는데, 오늘은 주민들이 연평도를 빠져나가 환자들이 거의 없다”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우려되는 주민들도 여럿 보여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 씨를 포함해 보건지소에 근무하던 공중보건의 4명과 옹진군 병원선을 타고 건너온 공중보건의 3명, 인천 길병원 소속 의사 등 모두 10명의 의료진이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박 씨는 “솔직히 무섭기도 하지만 주민들을 치료하는 것이 임무인 만큼 연평도를 떠날 수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연평도=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장관석 기자 j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