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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史·哲의 향기]기후-문화에 따라 다양한 농사 형태와 사람 이야기

입력 | 2010-11-20 03:00:00

◇쌀과 문명
◇피에르 구루 지음·김길훈 김건 옮김 344쪽·2만 원·푸른길




‘먹는다’는 단어는 베트남어 산탈리어 라오어 등에서 ‘쌀을 먹는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아침쌀 점심쌀 저녁쌀은 일본 규슈 지방에서 세 끼의 식사를 가리킨다. 캄보디아 농부는 다양한 품종의 벼에 특별한 이름을 부여한다. 면화 송이, 레몬 씨앗, 작은 벌, 하얀 고양이, 앵무새 눈썹 등 시적인 표현을 동원한다. 아시아에서 쌀이 차지하는 지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뿐 아니다. 홍 강 삼각주의 베트남 주민은 쌀을 정확하게 익히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과거에 빈옌 지방에선 매년 1월 쌀 익히기 경연대회가 열렸다. 말레이시아 사라와크의 이반 부족은 개간지 한구석에 꽃을 재배해 그곳에 쌀의 영혼이 머물도록 했다.

이 책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까지 벼농사 지역의 농경문화와 그에 따른 인문지리적 특징을 고찰한다. 저자 피에르 구루(1900∼1999)는 세계적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인류학 잡지 ‘인간(L'Homme)’을 창간한 프랑스의 문화지리학자. 그는 여러 해에 걸친 현지답사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쌀과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을 일궈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꼼꼼히 살폈다. 농경 방식의 차이를 세세하게 기술해 지리책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를 통해 제시하는 지역별 문명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운 대목이 많다.

지역에 따라 기후와 문명이 다르기에 벼농사의 형태나 쌀을 대하는 태도도 저마다 달랐다. 베트남 산악 지역의 므엉 부족에게 쌀은 신성한 대상이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입에 약간의 쌀을 물린다. 이 쌀은 특별하게 보관된 이삭에서 나온다. 길일에 이삭을 수확한 뒤 건물 골조의 두 번째 횡 대들보를 지탱하는 기둥에 걸어 오랫동안 집에 보관해뒀다가 구워 잘게 갈아서 장만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쌀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며 특별히 여성과 관계된다. 예전에는 여자가 쌀을 다루는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는 땅에 대한 노동만을 담당했다.

전 세계 쌀의 90%가 아시아 몬순(계절풍) 지역에서 생산되지만 벼농사가 아시아의 전유물은 아니다.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벼농사는 아시아와 비슷한 형태를 띤다. 마다가스카르의 독특한 특징으로 알려진 논을 밟아 다지는 방식도 아시아의 여러 벼농사 지역에서 실행된다. 한국에 대해 저자는 ‘농업 경작, 음식의 맛, 농부의 우수함 등으로 대변되는 벼농사의 나라’로 소개하면서도 ‘새로운 경제에 박차를 가하는 한국은 더는 전통적 벼농사의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에도 쌀과 문명의 관계에는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중앙아시아와 남부아시아의 비탈 지역은 많은 인구가 정착해 농사를 짓게 된 뒤 예술과 문학을 꽃피우며 진전된 문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중국의 예를 보면 쌀이 문명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문명이 쌀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단정 짓기 힘들다.

중국에는 북쪽에도 몇몇 지역에 논이 있지만 대부분의 논은 중부와 남부에 있다. 하지만 고도의 중국 문명은 현재 중국의 벼농사 지역이 아닌 산시, 허베이, 허난 성 경계의 북쪽에서 발생했고 그 문명이 남하하면서 남쪽의 농경문화가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 대신 저자는 “아시아의 위대한 문명은 쌀이 아니라 별다른 욕심 없이 벼를 열심히 경작했던 농부에게서 태동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