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당대회’ 성격 대표자회 2번 개최… 1차는 종파투쟁, 2차는 中蘇분쟁 이후
평양시내 인공기 걸고 분위기 띄우기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개막을 하루 앞둔 27일 평양 중심가 모습. 곳곳에 당 대표자회를 알리는 각종 깃발과 인공기가 걸려 있지만 거리는 한산하다. 평양=신화 연합뉴스
마지막으로 열린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에서는 김정일 당시 조직 담당 비서가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으며 공식적인 후계자로 등장했다. 김정일은 1974년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회(현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공인됐으나 후계자 자격으로 외부에 나타난 것은 6차 당 대회가 처음이었다. 이후 북한 매체들은 김정일을 ‘영광스러운 당 중앙’ 대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70년 11월 5차 당 대회에서 북한 지도부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기술혁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전체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이루자는 과제를 내세웠다. 아울러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1971∼1976년)이 발표됐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앞서 두 차례의 당 대표자회는 권력투쟁과 유일지배체제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변동과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1966년 10월 2차 당 대표자회는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갑산파 숙청의 와중에 열렸다. 김일성은 중-소 분쟁이라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며 ‘현 정세와 우리 당의 과업’이라는 보고를 통해 경제와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천명했다.
1958년 3월 4일간 열린 1차 당 대표자회에서 박금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1956년 일어난 반종파 사건을 비판하면서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김일성 독재 강화를 정당화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