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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안병직]6·25, 근대화의 신호탄

입력 | 2010-06-22 03:00:00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해서 부산 영도에 있던 해군소년단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있던 도중에 6·25전쟁을 맞이하였다. 소년단의 해산으로 함안의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전선이 마산까지 밀리는 바람에 김해군 진영에서 2개월가량 피란살이를 했다. 9·28수복으로 귀향하였으나 먹을 것이 없어서 미군 진지에 버려진 레이션 등으로 추수 때까지 가족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션과 미군이 버린 온갖 무기를 매개로 6·25전쟁은 나에게 미국문화를 강렬하게 전달해주었다.

상비군 늘려 산업역군 산실 역할

6·25전쟁은 나의 인생을 온통 뒤집어놓았다. 중학교에도 진학할 형편이 못 되었던 소년이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나에게 면서기라도 되었으면 하고 공부시켰는데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꿈만 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디 그것뿐이랴. 해외 유학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내가 외국에서 대학 교편생활을 10년 가까이 했으니, 아버지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셈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일이 6·25전쟁을 계기로 하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6·25전쟁은 한국에서 근대국가가 성립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는 하지만 근대국가 성립의 2대 요소인 재정자립과 상비군이 결여돼 있었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도 이러한 것이 언젠가는 이루어졌겠지만 6·25전쟁은 그러한 조건의 형성을 촉진했다.

우선 상비군의 건설을 보자. 물론 6·25전쟁 이전에도 상비군이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전쟁을 계기로 형성된 70만 대군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어느 정도의 상비군이라야 근대국가 건설의 요건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문가의 검토에 맡겨야 하겠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막강한 국민군이 형성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비군의 형성은 한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조선왕조에서도 군대는 있었으나 상비군은 수천 명의 대궐문지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산업화는 5·16군사정변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한국의 산업화와 5·16군사정변으로 성립한 군사정권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일각에서는 1963년의 국민투표로 성립된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권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군사정권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다. 민정 이양 이후에도 정부의 운영자체가 군부세력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항상 강력한 국민적 저항에 시달리던 한국의 산업화가 군부의 뒷받침 없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매우 의심스럽다. 이리하여 한국은 산업화로 재정자립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전쟁이 남긴 것들

그리고 70만 군대는 한국산업화를 위한 초기역량의 많은 부분을 공급하였다. 산업화를 위한 기획 관리 기술 및 기능의 역량까지도 군부에서 공급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군은 기계화 부대이다. 한국군도 기본적으로 미군의 제도에 따라 편성되었으므로 기계화 부대로 편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군대에서 훈련 받은 제대군인은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한국산업화의 많은 역군을 6·25전쟁을 계기로 형성된 군대가 공급했다.

6·25전쟁은 진실로 잔인한 전쟁이었다. 남측의 사망자만 하더라도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6·25전쟁을 냉철한 역사적 눈으로만 보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나 한미관계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찰도 필요하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