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 직후인 2000년 4월 ‘무조건 장외투쟁에 따라 나오라’는 당 지도부의 명령을 한 번 거부했습니다. 그랬더니 ‘너만 잘났냐’는 압박이 계속 들어오더군요. ‘왕따’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제왕적 총재’로 불린 이회창 총재 시절 초선 의원들이 여야 대치의 전위대로 앞장서야 했던 부끄러운 과거였다.
“이렇게 부끄러운 자신의 입으로 선배들께 감히 용퇴를 요구한 그 용감함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제 자신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오 의원의 ‘내 탓이오’ 참회록이 2년 뒤 서울시장 출마를 노린 정치적 포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참회록은 초선 의원의 자기비판으로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2010년 6·2지방선거 이후 다시 초선 의원들이 움직이고 있다. 선거 참패의 충격에 휩싸인 한나라당이 돌풍의 진원지다. 당 소속 초선의원 89명 중 53명이 모여 초선쇄신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11명의 실무위원회를 구성해 ‘당내 당’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일부 재선 의원들도 초선 의원들의 움직임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초선 의원들이 쇄신의 깃발을 들면서 청와대 참모진의 인적 쇄신에 초점을 맞춘 것은 나름대로 수긍할 만하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의 정무적 판단은 곳곳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집권 반환점을 맞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대를 유지하면서 이런 착시(錯視) 현상이 빚어졌다는 지적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동안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계 갈등 전선에서 몸을 사리지 않던 초선 의원들이 정작 자기반성의 ‘제단’ 위에선 몸을 사리는 이유가 궁금하다. 친이-친박 의원 모두 평소엔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임을 내세우면서도 불꽃 튀는 계파대리전은 외면하지 않았다. 초선 의원들이 뒤늦게 계파화합을 외치지만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뒤늦은 감이 있지만 김용태 의원이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라고 선언한 것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 사장님은 ‘세종시 문제로 야당 말고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정말 실망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이라는 자가 노상 싸우기만 하니 도대체 우리 서민들은 누구를 믿나’라고 말했습니다. (중략) 저는 정부와 청와대에 쇄신을 요구하지 못하겠습니다. 제 스스로 쇄신을 요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절한 자기반성의 기반 없이 쌓아올리는 쇄신의 탑이 얼마나 공고할 수 있을까. 자칫 “선거만 지면 나오는 레퍼토리”라는 불신만 키우지 않을까. 울림이 없는 정치는 미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