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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병기]복수의 경제학

입력 | 2010-06-02 03:00:00


복수.

피와 폭력의 냄새가 물씬 난다.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근대 법치주의는 사적(私的)인 복수를 금지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고 간다”는 주장도 복수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과 결을 같이한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이 주어진 게임이론은 복수는 평화의 반대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국가간의 관계처럼 갈등을 처리해주는 권위 있는 기관이 없을 때는 복수는 오히려 협력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제된 복수’와 ‘용서’라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깨달음은 ‘협력이론’으로 발전돼 복잡계경제학, 협상학, 진화생물학, 군사학 등 많은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복수와 협력의 관계를 주목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였다. 당시 양측 전쟁지휘부는 일선 부대가 지시를 어기고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례가 많아 골치를 앓았다. 조사를 나온 영국 참모 장교가 “적의 참호가 100m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병사들이 편안하게 돌아다니고 전투를 독려하면 허공에다 총을 쏜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사회학자가 연구에 착수해 △참호전의 특성상 고정된 장소에 장기간 배치돼 양측 부대 간에 지속적인 관계가 형성됐고 △서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네가 안 쏘면 나도 안 쏜다”는 묵시적인 규칙이 생겨났으며 △적이 룰을 어기면 즉각 보복에 나서 파괴된 규칙을 복원하는 시스템이 ‘기묘한 평화’를 가져왔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이 평화는 전쟁 양상이 참호전에서 기습공격형으로 바뀌면서 막을 내렸다. 전투 상대방이 계속 바뀌면서 협력과 보복의 규칙을 적용하기 불가능해진 것이다.

복수의 효과가 명확히 규명된 건 1970년대 말 미국 미시간대의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가 개최한 컴퓨터프로그램 전투대회에서다. 전 세계에서 15가지 전략을 상징하는 프로그램이 참가해 이들끼리 수백 번씩 승부를 가린 결과 팃포탯(Tit for tat)이라는 프로그램의 승률이 가장 높았다. 팃포탯은 ‘눈에는 눈’이라는 뜻으로, 받은 대로 대응하는 단순한 원칙의 프로그램이다.

팃포탯은 훨씬 복잡한 전략을 가진 63개의 프로그램이 겨룬 2차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배반을 일삼는 ‘마키아벨리형’ 프로그램도, 무조건 용서하는 ‘간디형’도, 한번 배반하면 끝까지 응징하는 ‘칭기즈칸형’도 모두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액설로드 교수는 ①먼저 배반하지 말 것 ②배반하면 즉각 보복할 것 ③상대가 반성하면 용서할 것 ④상대방이 내 행동패턴을 이해하도록 명확한 전략을 사용할 것 등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4가지 원칙도 제시했다.

이제 응징 단계에 접어든 천안함 정국은 변수가 너무 많아 교과서처럼 협력상황으로 복귀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팃포탯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 북한군 46명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부정치라는 변수가 있어 어느 정도를 북한의 반성으로 봐야할지 합의하기도 어렵다. 자칫 보복의 악순환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올 소지도 크다. 김정일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내 절제된 보복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협력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내 전략이 바뀌는 게임이다. 정답을 준비해 놓기가 불가능하다. ‘단호함’과 ‘냉철함’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개성공단을 아직 폐쇄하지 않은 북한의 대응에서 가냘픈 희망의 빛을 본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