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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결혼해 홀로 외로웠나요 하지만 국민들은 행복했습니다

입력 | 2010-03-15 03:00:00

故 박춘석 선생을 기리며…




14일 세상을 떠난 박춘석 선생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와 찬사가 전해진다. 그러나 선생의 명복을 비는 자리에서 모든 것에 앞서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음악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외로웠던 그, 하지만 아름다운 노래로 자신과 많은 국민의 마음을 달랜 국민 작곡가라고.

1950년대 SP시대를 지나 LP시대, 그리고 CD시대까지 풍미하며 한국 가요의 큰 줄기를 이룬 선생은 활동 기간 40여 년 동안 작품 수 2700여 곡이 말해주듯 매일 작품을 쓰고 또 썼다. 1994년 뇌중풍으로 쓰러지던 당시에도 피아노 앞에서 밤샘 작업 중이었다.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유독 싫어했던 선생은 와병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거부해 왔다. 트레이드마크인 ‘굵은 뿔테 선글라스’도 투병 중에는 단지 멋으로만 쓰는 게 아니었다. 투병 중 스스로 거동이나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지만 자다가도 누가 옆에 있으면 금방 알아차릴 만큼 감성이 예민했다.

16년간의 투병 생활 중 선생의 유일한 낙은 TV 시청이었다. 특히 가요프로그램을 빼놓지 않고 봤는데 패티 김, 이미자, 남진 씨 등이 나오거나 ‘비 내리는 호남선’을 비롯해 자신이 만든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를 때면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을 만큼 마지막까지 음악을 사랑했다.

그런 그는 음악 사랑뿐 아니라 재능도 남달랐다. 가요계 인사들은 그에게 ‘천재’라는 칭호를 붙이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가수 패티 김 씨는 “선생님은 부를 가수에 따라 작곡 스타일을 다르게 했던 분”이라며 “내게는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사랑은 생명의 불꽃’ 같은 시(詩)적이고 세미클래식조의 곡을 주셨다”고 회고했다.

그 말처럼 선생이 남긴 작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초기 작품은 패티 김 씨에게 준 것과 같은 세미클래식 풍 위주였다.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안다성)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패티 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같은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이미자 씨를 만난 뒤 트로트의 길로 들어서 이 씨의 히트곡들 외에도 ‘가슴 아프게’(남진) ‘공항의 이별’(문주란)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하동포구아가씨’(하춘화) 등 트로트 풍의 노래를 연달아 발표했다. 특히 가요계의 명콤비로 불리는 이미자 씨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그는 전속 음반사를 옮기기까지 했다. 이 씨는 이후 선생의 노래로 히트 퍼레이드를 벌였다.

그에게 세상은 ‘표절’의 혐의를 덧씌우기도 했다. 이미자 씨 3대 히트곡 중 하나인 ‘섬마을 선생님’은 일본 노래를 표절했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 이 노래는 오히려 표절로 제시된 일본 노래보다 먼저 작곡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명성은 역으로 일본에 전해져 1978년 일본 컬럼비아 측의 의뢰로 일본 최고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가제사케바(風酒場)’라는 곡을 주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미소라 히바리가 타계했을 때 ‘초청하객 인사 100인 명단’에 그가 포함될 만큼 음악성을 인정받았다.

작사가인 지명길 한국대중문화예술연구원 회장은 “그의 작품들엔 악상이 살아있다”며 “노래 모두의 전주와 간주는 물론이고 치밀한 계산 아래 다양한 편곡을 스스로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렇게 선생은 1980년대 후반까지 히트 제조기 명성을 이어왔고 가요계에서는 “어떤 가수도 박춘석 선생에게 픽업되면 성공한다”는 히트 공식까지 나왔다.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은 수십 년을 거치며 변했지만 대중의 감성에 곧바로 다가서는 선생 작품의 호소력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박성서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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