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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원재]은행 성적표와 ‘은행장 효과’

입력 | 2010-03-08 03:00:00


국민은행은 전국에 1200개의 영업점을 갖고 있고 260조 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한 국내 최대 은행이다. ‘한국의 리딩뱅크’로 자부했던 이 은행의 작년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2008년엔 순이익이 1조5000억 원을 넘어 1위였지만 작년엔 6538억 원으로 절반 이상 쪼그라들었다.

우리은행의 지점은 900여 개이고 자산규모는 237조 원으로 국민, 신한과 함께 국내 은행업계 ‘빅3’에 속한다.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을 받아 기사회생한 이 은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파생상품 투자로 1조5000억 원의 엄청난 손실을 내 순이익이 2300억 원에 불과했다. 공적자금을 탕진한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던 이 은행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작년 순이익이 1조 원에 육박해 단숨에 선두권으로 뛰어올랐다.

두 은행의 명암을 가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주택담보대출의 비중이 큰 국민은행은 금리 하락으로 이자 마진이 줄어든 타격이 컸다. 우리은행이 일부 자산을 팔아 일회성 이익을 올린 것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두 대형 은행의 성적표가 1년 사이에 극적으로 역전된 것을 이런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경영진을 떼어놓고 기업의 실적을 얘기할 수 없다. 두 은행의 성적표에도 경영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른바 지배구조의 안정성이다. 국민은행이 최악의 실적을 낸 작년 4분기는 모그룹인 KB금융지주의 회장 선출로 빚어진 혼선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이 은행은 황영기 전 KB지주 회장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이 1년 내내 거듭되면서 지배구조 불안이라는 잠재적 악재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황 회장이 물러난 뒤엔 다음 회장이 누가 되는지, 회장과 행장은 겸임하는지 등을 놓고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강정원 행장의 단독 출마와 이사회의 내정, 후보 사퇴 같은 반전이 되풀이되면서 조직이 흔들렸다. 이런 상황을 은근히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행태를 보인 금융당국도 실적 악화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은행의 약진은 금융회사 경영에서 안정된 지배구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2001년 우리금융그룹이 출범한 이후 회장과 행장을 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 맡은 것은 현재의 이팔성 회장과 이종휘 행장 체제가 처음이다. 관료 출신 회장에 비(非)은행 전문가가 행장으로 포진한 구도에 익숙했던 직원들로서는 의욕을 느꼈을 법하다. 이 회장은 외형 확장 대신 기본에 충실하며 내실을 다지는 경영을 강조했다. 이 행장은 현장을 부지런히 누비며 공적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봉급이 깎인 직원들의 상실감을 달래고 응집력을 키웠다.

두 은행의 실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국민은행 경영진이 안정되지 않으면 올해도 실적이 좋아지기를 기대하긴 힘들다. 새 회장이 언제, 어떤 원칙과 절차에 따라 결정되는지 투명하게 밝히고 일정도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 우리은행도 민영화와 인수합병(M&A)의 파고에 휩쓸려 수뇌부가 어수선해지면 상승세에 난기류가 끼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은행장 또는 지주 회장을 둘러싼 자리다툼의 최대 피해자는 은행과 은행원이라는 것이 ‘KB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 앞으로 펼쳐질 은행 M&A 국면에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난다면 한국은 금융 후진국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된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