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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집중분석] 추노, 두터운 이야기 그리고 헐벗은 영상

입력 | 2010-02-11 18:00:18



명색이 공연담당 기자인지라 평일 밤 10시 TV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습니다. 주말 낮 공연을 봐야할 경우도 많아 재방송 볼 시간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도 짬날 때마다 흠칫 흠칫 훔쳐보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KBS 2TV 수목드라마 '추노'입니다. 풍성한 이야기, 화려한 영상, 다양한 캐릭터. 근래 보기 힘든 수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제가 가장 칭찬하고 싶은 것은 '두터운 이야기'입니다.

‘추노’의 등장인물들은 카메라가 비추지 않을때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드라마의 조연 연기가 유난히 빛을 발하는 이유다. 사진제공 KBS


▶추노의 미덕, 두터운 이야기

'추노'의 등장인물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습니다. 양반신분에서 도망노비 사냥꾼이 된 주인공 이대길(장혁), 대길의 가노(家奴) 출신으로 애증이 뒤섞인 대길의 추격을 받는
김혜원(이다해), 조선 최고 무장(武將)에서 관노로 전락한 뒤 소현세자의 유일한 혈육 석견을 옹립하기 위해 도망노비로 쫓기는 송태하(오지호)…. 이런 주연급은 물론 단 한 회 등장하는 인물조차도 조갯살에 박힌 모래알과 같은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연이 주르륵 펼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혜원을 남몰래 흠모하던 호위무사 백호(데니 안)처럼 짝사랑의 비밀을 안고 죽고, 송태하의 부하인 곽한섬(조진웅)이 사랑했던 궁녀는 들릴 듯 말 듯 이름과 고향만 밝히고 숨을 거둡니다. 하지만 이를 연기한 배우의 표정에는 짙은 회한과 안타까움이 가득 배어 나옵니다. 비록 시청자에게 속속들이 밝히지 못하지만 그들 나름의 사연이 한 보따리씩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작가 천성일은 그렇게 이야기를 다 풀어놓기 보다는 감추는 방식으로 드라마에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조선시대 이름 없이 사리진 수많은 민초도 모두 한때 꿈을 지녔고 인생을 살면서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살아간 사람이었음을 '말없는 웅변'으로 펼쳐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책이 열권도 넘을 것"이란 민중의 욕망을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귀신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줍니다.

이로 인해 이 드라마는 바다위로 극히 일부만 노출하고 그 밑으로 더 큰 실체를 간직한 빙하의 포스(force)를 갖추게 됩니다. 카메라가 주로 초점을 맞춰서 쫓는 대길과 태하 말고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인물들 사이에 엄청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드라마를 수동적으로 시청하던 이들에게 적극적인 개입의 여지를 부여합니다. 바로 드라마가 일부만 보여주고 스쳐 지나간 주변 인물의 사연을 상상하고 추리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얇은 이야기의 드라마 vs 두터운 이야기의 드라마

‘추노’의 등장인물은 모두 모래알 같은 아픈 사연들이 있다. 그러나 작가 천성일은 이야기 보따리를 한꺼번에 풀어놓기보다 감추는 방식을 택했다. 사진제공 KBS


이는 그동안 우리 영상매체가 간과해왔던 화법입니다. 영상은 큰 그림 속 일부만을 클로즈업해 선택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눈으로 봤다면 한 눈에 들어올 시각정보의 일부를 쪼개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영상매체가 탐미적이면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이유는 이런 정보처리의 자의성과 독재성에서 출발합니다. 이로 인해 영상매체의 관객은 카메라가 걸러낸 정보를 수동적 또는 피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TV드라마는 이런 정보처리의 자의성에 기대어 한 가지 목소리만 들려주는 사실상의 모노드라마를 펼쳐냅니다. '드라마의 여왕' 김수현과 그를 벤치마킹한 임성한 등 인기방송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어투나 세계관, 인생관이 매우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1명의 인물(방송작가)이 수십 개의 가면을 바꿔써가며 펼치는 1인극을 닮았습니다. 좀 과장해 말하자면 등장인물에 따라 계속 목소리를 바꾸지만 결국은 1명의 화자가 유치원생들에게 들려주는 구연동화와 다를 바가 없는 셈입니다.

이런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는 대부분 매우 얇습니다. 등장인물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 갈등구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야합니다. 그러다 보니 '알고 보니 남매'나 너무도 우연이 남발되는 '출생의 비밀'이 계속 생산됩니다. 카메라가 초점을 맞추는 주인공의 기막힌 사연만 부각되는 탓에 늘 주인공의 온갖 고민을 들어주느라 정작 자기인생은 없는 '주인공 친구'들이 넘쳐납니다. 그나마 짝짓기에 성공하는 주인공 친구들은 죄다 주인공 주변 인물과 맺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추노의 두터운 이야기 구조가 돋보이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지 않을 때도 저마다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다 카메라가 비치기라도 하면 "여보, 내 사연 좀 들어보소"라며 장광설을 늘어놓으려 하는데 다시 카메라가 스쳐지나가는 그런 느낌입니다. 보여주고 들려줄 것은 많지만 시간관계상 이 정도에서 그치니까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알아서 상상하슈, 뭐 그런 느낌이죠. 이는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가 1930년대 소설에서 이미 성취했으나 1990년대 동명의 TV드라마가 놓쳤던 서사미학의 복원입니다.

이 작품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나는 점도 이런 이야기 구조가 큰 몫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드라마엔 일부만 비칠지언정 인물 각각의 사연과 고민이 형상화돼 있기 때문에 배우들이 거기에 맞춰 자신의 배역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성동일, 이한위, 윤문식, 안석환, 조미령 등 내로라하는 조연배우의 연기가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황철웅(이종혁)의 칼에 잃은 자신의 부하의 돌무덤을 만들어주던 악당 천지호역의 성동일이 "내가 살면서 은혜는 못 갚을지언정 원한은 꼭 갚는다"며 뜨거운 눈물이 아니라 차가운 웃음을 계속 쏟아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추노의 아킬레스건, 헐벗은 영상

‘추노’의 영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불필요한 액션에 취해 합(合)이 맞지 않는 어색한 모습이 종종 연출되기도 한다. 사진제공 KBS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노에도 아킬레스 건이 존재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타성적인 영상문법에 계속 저항하는데 영상은 정반대입니다. 다시 말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고 탐미적인 영상문법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장된 액션의 남발과 불필요한 노출의 반복, 배경에 취해 정작 인물의 심리를 망각한 미장센, 끊임없이 도돌이표를 맴도는 감상적인 주제곡….

물론 이대길과 송태하의 갈대밭 대결 장면이나 제주도 바다를 배경으로 혜원과 송태하의 헤어짐과 만남을 그려낸 영상미학은 감탄할만합니다. 하지만 대길과 태하, 철웅 3명의 결투장면처럼 서로 합(合)이 맞지 않는 어색한 액션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액션 과잉의 부작용입니다. 게다가 불필요한 노출장면의 남발은 조선민중의 건강함을 담아내는 풍속화의 정취를 담아내려다 어설픈 춘화를 그려내는 민망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죽이고 벗기는 그런 영상은 결코 충만한 영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헐벗은 영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추노의 이야기는 구름을 통해 달의 형상을 담아내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미학은 터득했건만 그 영상은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지혜를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 보다는 일부를 통해 전체를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절제와 여백의 미를 발휘하는 영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요.

좋은 드라마는 영상매체의 타성적 문법과 팽팽한 씨름을 펼치는 드라마입니다. 분할된 낱낱의 장면 장면을 조립해 관객이 스스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상매체의 한계를 돌파해 시청자의 능동적 참여와 해석을 끌어낼 수 있는 그런 참신한 영상미학으로 무장한 드라마가 더 많이 출현하기를 고대해봅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