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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전우치’ 최동훈 감독에게

입력 | 2010-01-05 03:00:00

장황한 수다에 증발한 압축-긴장의 미학



동아일보 자료 사진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흔히 박찬욱 봉준호가 언급되지만, 난 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감독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최동훈과 김용화다. 잘난 체하거나 필요 이상의 자의식을 작품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치밀하게 직조된 이야깃거리를 존재감 있는 캐릭터들에 태워 풀어내는, ‘기본기’가 강한 대중예술가란 판단에서다.

사실, 재능 있는 감독 중 적잖은 수는 장편 데뷔작이 성공한 뒤 두 번째 작품에서 흥행에 쓴맛을 보는, 이른바 ‘차기작의 저주’에 걸리고 만다. 일단 감독 데뷔를 성공적으로 해야 하니 첫 작품은 대중의 눈높이와 취향을 고려한 타협적인(?) 영화를 만든다. 이 데뷔작이 흥행에 성공하면 자의식을 담아 ‘내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게 된다. 결과는? 흥행 참패다.

이런 점에서 최동훈과 김용화는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대중적 감각과 저울질할 줄 아는 지혜로운 감독들이다.

최동훈이 누군가?(단 두 편의 영화로 예술세계를 단언할 순 없지만) 두 편의 전작들을 감안할 때 그는 팩트(fact)에 목숨을 거는 감독이다. ‘범죄의 재구성’ 각본을 쓰기 위해 그는 20개월간 17회나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 “4번 말 찍어. 청진기 대니까 진단 나와” 같은 대사들은 좀 더 현실적인 대사와 캐릭터를 찾아 밑바닥을 지독하게 훑었던 최동훈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 사실, 최동훈의 영화는 김용화의 그것과 달리 격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선물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는 건조한 팩트들이 숨 막힐 듯 나열되고, 여기서 유발되는 낭만적이면서도 묘하게 신경질적인 긴장감이 그를 한국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자리 잡게 만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20억 원을 들인 최동훈의 신작 ‘전우치’는 매우 실망스럽다. 현실을 떠나 판타지의 세계로 훌쩍 날아 들어가 버린 그의 스타일 변화가 실망스러운 게 아니라, 취재와 팩트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그의 근원적인 태도 자체가 난 걱정스럽다.

“도사는 바람을 다스리고 마른하늘에 비를 내리고 땅을 접어달리고 날카로운 검은 바람보다도 빨리 휘두르고 그림을 꽃처럼 다룰 줄 아니. 가련한 사람들을 돕는 게 바로 도사의 일이다”(전우치) “도가의 적막함보다 유가의 입신양명을 꿈꾸는 게 알고 보면 꿈처럼 허무한 건데, 그걸 또 모르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거고, 그렇다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거잖습니까? 사람 일이….”(초랭이)

좋게 말하면 마당극 같고, 더 좋게 말하면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듣는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라디오 시대 장소팔 고춘자 커플의 만담을 전해 듣는 것 같은 이 영화에는 대사의 쾌감은 있을지언정 ‘졸가리’가 심하게 없다. 대사와 이야기의 압축은 찾을 수 없고, 반대로 한 줌짜리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길고 장황하게 늘인 기색이 역력하다. 대사가 속사포처럼 쏟아질수록 극적 속도감은 오히려 줄어들고, 캐릭터들이 수다를 떨면 떨수록 그들의 내면은 되레 증발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예술가는 자신의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시도를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예술적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과는 분명 별개의 문제다. 예술적 자유는 뼈를 깎는 고뇌와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 그리고 심각한 자기학대의 산물이어야 한다. 지금 최동훈의 곁에는 “현실성이 하나도 없어. 다시 써와!” 하고 시나리오를 내던지면서 그를 참견하고 단련시키는 차승재 같은 제작자가 없다. 그래서 지금이 그에겐 기회이자 위기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