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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압력 → 고강도 조사 → 문책 압박… 관치금융 부활?

입력 | 2010-01-01 03:00:00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금융당국의 압력을 뿌리치고 KB금융지주의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 인터뷰를 강행해 회장으로 내정됐다가 끝내 후보직을 내놓게 된 과정은 한국 금융계에서 관치(官治)금융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KB금융지주 회장후보 사퇴를 계기로 관치의 막강한 영향력을 확인한 금융회사의 경영진이 금융당국의 눈치를 더욱 살피게 되면서 경영의 자율성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글로벌 수준에 맞는 선진금융을 지향한다는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수십 년 전으로 뒷걸음질쳤다”는 탄식도 나온다.》
姜행장 “경영부담 커질것” 판단… 후보 선출 28일만에 백기
내달 사외이사 개편뒤 정부 코드에 맞는 후보 재선출할 듯


○ 금융당국의 전방위 사퇴압력에 굴복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가 지난해 12월 초 회추위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던 강정원 행장에게 전화를 건 것은 현행 사외이사제도의 문제점이 많아 제도를 정비한 뒤 회장을 선임하는 게 절차상 바람직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표현을 두루뭉술하게 했지만 다른 회장 후보였던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이나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 대표처럼 일단 사퇴하라는 뜻이 분명히 전달됐다.

전화를 받은 강 행장은 사퇴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KB금융지주 임원과 자신이 평소 알고 지내던 정부 측 인사의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지금이 아니면 다시 기회가 오기 어렵다”며 물러나지 말 것을 권유하자 강 행장은 회추위 인터뷰를 강행했다.

사퇴 압력을 받고도 강 행장이 출마를 포기하지 않고 최종후보로 선출되자 금융감독원은 1월로 예정된 KB금융과 국민은행에 대한 종합검사에 앞서 지난해 12월 16일 사전조사에 서둘러 착수했다. 고강도 조사를 벌여 강 행장의 경영상 실책이나 개인비리를 수집하려는 의도였다. 당국은 조사 결과 국민은행이 지난해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을 인수한 뒤 3억 달러 안팎의 대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한 정황을 확보하고 경영진에 대한 문책 여부를 검토 중이다. 금융계는 이 정도 규모의 투자손실이 적법한 위험관리 절차를 거치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면 최종 책임자에게 주의 이상의 문책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 행장은 금감원의 사전조사가 예상보다 훨씬 강도 높게 이뤄지자 이사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장 후보직을 고수하면 자신을 포함한 KB금융 임직원 중 상당수가 문책을 당하게 되는 등 경영상의 부담이 커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강 행장이 12월 31일 이사회가 열리자마자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임시 주주총회 취소를 결정하는 등 회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강 행장과 사외이사들 간에 사퇴에 대한 암묵적 교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 ‘나쁜 관치’의 부활

이번 사태는 2004년 김정태 당시 국민은행장이 금융당국의 눈 밖에 나면서 연임에 실패한 것과 비슷한 면이 많다. 당시 김 행장이 하이닉스반도체, SK글로벌 등의 처리와 관련해 정부 주도로 회생계획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한 탓에 당국이 회계처리기준 위반이라는 사유를 들어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 금융계의 정설이다.

이번에는 금융당국이 강 행장이 이미 국민은행장을 연임한 상황에서 KB금융 회장 자리까지 차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전화로 사퇴를 종용하는 한편 검사를 통한 압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민간 은행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임한 회장 후보를 사퇴하도록 종용하고 문책거리를 억지로 찾아내 사퇴를 유도하는 것은 가장 나쁜 형태의 관치”라고 지적했다. 금융시장의 자금 흐름을 정상화하고 서민금융을 지원하는 취지의 ‘좋은 관치’는 필요하다는 점에서 금융회사에 대한 정부 개입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정부의 입맛대로 금융회사를 통제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관치는 해당 은행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자금의 흐름도 왜곡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은행 자율경영 크게 위축될 듯

강 행장의 사퇴로 사외이사 제도가 바뀌는 2월 이후 구성되는 KB금융 회추위에서는 친정부 인사를 후보로 선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최근 퇴임한 관료 출신 인사를 회장 후보로 내세우기는 쉽지 않겠지만 퇴임한 지 오래됐거나 정부와 평소 일을 같이 해 ‘코드’가 맞는 인물이 후보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따라 전직 경제관료와 전직 대학총장 등이 벌써부터 차기 회장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KB금융지주 이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외이사 구성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KB금융 전체 지분의 5.26%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사외이사 후보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

시중은행들은 이번 사퇴 파동으로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된 모습이다. 한 은행의 투자 담당 임원은 “공격적 경영을 위해 증자가 불가피한데 당국이 외형을 늘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강 행장 사퇴 건에 대해 당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여 말을 꺼내기조차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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