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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2010]중편소설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입력 | 2010-01-01 03:00:00

일러스트 김수진 기자


<요약>

아무에게도 읽히지 못하고 오로지 작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다 사라지는 책들이 있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 케이는 바로 그런 책을 쓰는 작가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소설만 쓴다. 내가 보기에 그 소설들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불가해한 얘기들이다. 그러나 케이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가 써낸 소설들은 때로 현실로 실현되기도 한다. 가령 위장병이 걸린 여자 얘기를 쓴 뒤 실제로 위장병에 걸린다거나, 괴물사마귀에 대한 소설을 쓴 뒤 정말 괴물사마귀가 나타난다는 식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일이 일어난다. 케이 자신이 사라진 것이다.

케이가 사라진 건 겨울이 시작되던 날이다. 공식적으로 케이가 남긴 것은 지갑과 빨간 스웨이드 구두가 들어있는 가방뿐이다. 그 가방을 한강대교 근처의 둔덕에서 찾아낸 형사는 자살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채 수사를 진행시켜나간다. 하지만 케이가 강물로 걸어 들어갔으리라는 형사의 추리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케이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케이와 나는 어린 시절 강물에서 엄마를 잃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그리워하다 오랜 병치레 끝에 죽었다. 그 시절을 함께 견디며 쌓아온 케이와의 추억들이 무심한 형사의 손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협조하는 대신, 흩어진 기억을 조합해가며 스스로 케이의 행방을 추적하는 쪽을 택한다.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해 보기도 하고, 케이의 흔적들도 하나씩 되짚어본다. 그러나 핸드폰이나 통장, 친구도 없이 외골수로 지내다시피 한 케이를 세상은 이미 기억하고 있지 않다. 형사는 형사대로 케이가 남긴 것들 속에서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들을 찾지만 제대로 된 증거물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이 사건의 끝이 좋지 않으리라고 추정하는 형사와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나의 관계는 점점 틀어져 간다. 시간은 고통 속에서 지난하게 흐른다.

한 계절이 지나간다. 뉴스에서는 첫 봄비가 올 거라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사건에는 진척이 없고, 나는 여전히 겨울의 한가운데 선 것처럼 추위를 느낀다. 내 삶은 어느새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그동안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케이의 집이자 나의 고향인 옛집으로 돌아와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가족들과의 추억이 구석구석 숨은 그곳에서 나는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며 시들어간다. 그러다 마침내 형사가 찾아내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낸다. 그것은 ‘my everything’이라는 제목이 붙은 CD다. 그 CD를 제외한 모든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나는 그것에 모든 희망을 걸지만, 막상 열어본 CD 속에는 낯선 남자의 사진 한 장만이 달랑 들어있을 뿐이다. 케이를 자기중심적인 외톨이로 기억하는 나는 어째서 ‘나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 속에 케이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사진이 들어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나의 언니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냉정하게 포기를 종용하는 형사에게 CD의 존재를 숨긴 채, 홀로 사진 속의 남자를 찾아 나선다. 그의 얼굴이 케이의 지갑에 들어있던 핸드폰 수리기사 명함 속의 얼굴과 동일하다는 것을 기억해낸 나는 무작정 시내의 핸드폰 서비스센터를 돌며 남자를 찾는다. 내내 성과 없는 실패가 이어진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한때 케이가 일했던 카페 근처에 대규모 서비스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드디어 남자의 위치가 가시 범위 내로 좁혀지게 된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물에 빠뜨려 고장 낸 뒤 서비스센터로 찾아갈 계획을 세운다. 무장을 하고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굳은 각오로 길을 나서지만, 센터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나약하게 흔들린다. 이 계획이 보잘 것 없는 희망에 기댄 미련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는 형사의 말처럼 케이가 자살했거나, 납치 또는 살해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나는 형사처럼 나쁜 끝만을 기다리고 있을 입장이 못 된다. 턱없이 부실한 지푸라기일지라도 매달려보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서비스센터에서 만난 남자는 기계적인 친절로 나를 대할 뿐, 케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나의 마음은 한 계절을 끌어온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로 일그러지고, 심지어 현실에서 분리된 것 같은 착각을 겪는다. 핸드폰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깨끗하게 수리되지만, 정작 내 자신과 내가 처한 현실은 조금도 수리되지 못한다. 케이의 실종에 대해 안 좋은 결말을 예상하는 형사와 반대로 지나치게 희망적인 결말을 꿈꾸는 나. 결국 그 둘 사이의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도 귀결되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만다.

센터를 나온 나는 케이가 사라진 지점인 한강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케이와 엄마, 아빠가 사라진 과정을 다시금 떠올린다. 시간을 거슬러 모든 잘못된 기억과 상처들을 회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희박한 확률의 기적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문득 이미 멸망해버린 지구 위에 선 듯 외롭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다. 내가 포기하면 케이는 이제 그녀 자신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장편을 준비하는 작가처럼, 그리고 케이처럼 단단한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것이 설령 마른 풀로 쌓아올린 탑이 될지언정, 나는 조금 더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아주 긴 이야기가 될지언정, 나는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은 것처럼.

정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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