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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아이들 너무나 그립소 함께할 날만 손꼽아…”

입력 | 2009-07-27 02:57:00

‘매클레인 대위 판문점 도착’ 보도윌리엄 매클레인 대위가 정전협정으로 풀려난 뒤 1953년 9월 5일 판문점에 도착해 중공군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이 고향 오하이오 영스타운의 지역신문 ‘영스타운 빈디케이터’에 소개됐다. 그는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출처 영스타운 빈디케이터


오늘 정전협정 56주년… 6·25 참전 미군포로 매클레인 대위의 ‘수용소 편지’

압록강변 수용소서 34개월

1953년 9월 美 가족품으로

박대헌 영월책박물관장 올해초 구입… 본보에 공개

《“당신과 아이들, 가족 모두가 너무나도 그리워. 나는 우리 가족이 함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오. 돌아가면 할 것이 너무나도 많잖아. 내가 얼마나 많은 계획을 짜고 있는지…. 나는 잘 지내니 내 걱정은 말아요.”(1952년 9월 22일) 편지 한 통 한 통에는 전쟁 중 포로로 붙잡힌 군인의 외로움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수십 년간 전쟁자료를 수집해 온 영월책박물관 박대헌 관장이 7월 27일 정전협정 56주년을 맞아 올 초에 어렵게 구한 한 미군 포로의 편지 10여 통과 회고록 등의 자료를 26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보여주듯 바스러질 것 같은 편지에는 포로수용소에서 고단한 시간을 보내며 전쟁이 끝나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한 군인의 34개월 포로생활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편지의 주인공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대위 윌리엄 매클레인(1921∼2004).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 딸 베티 앤과 아들 빌리, 로저를 두고 있던 그는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제1기병사단 소속으로 일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상부의 명령이 떨어지자 7월 12일 일본을 떠나 7월 18일 포항에 상륙하면서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7월 20일 영동 방어선에 투입된 후 낙동강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입됐다. 부대는 9월 28일 서울 탈환 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도 계속 북진했다. 압록강을 확보하는 것이 부대의 임무였다. 하지만 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훗날 집으로 돌아가 정리한 ‘나의 조국, 나의 가족, 나의 삶’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그는 “밤이면 비명과 휘파람 소리가 공포감을 자극했다. 어둠 속에선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아침에 일어나보면 적들은 또 사방에서 칼을 겨누고 있었다. 전우들의 시체는 자꾸 쌓여 갔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전투를 벌이던 매클레인 대위는 11월 5일 중공군에게 붙잡혔다. 그가 끌려간 곳은 압록강 근처에 있는 벽동포로수용소 제2캠프였다.

미군 대위에서 중공군 포로 신세가 된 그에게 포로수용소 생활은 하루하루가 고난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마치 돼지처럼 취급했다. 특히 1950년에서 1951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음식도 없고, 담요나 옷도 없었다. 사방에선 이가 내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매클레인 대위의 회고록 중) 그는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붙잡혔다.

6·25 참전 미군포로 매클레인 대위의 ‘수용소 편지’

“포로협상 길어질 것 같은데… 당신이 더 힘들겠지?”

“4개월전 답장 오늘 받았소 아이들 데리고 고생 많지…”

“중공군은 우리를 돼지 취급, 세번 탈출시도… 번번이 잡혀”

회고록에 당시 참상 생생

지루하고 불안한 포로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 준 것은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중공군은 포로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는지는 몰라도 편지 쓰기를 허락했다. 편지를 받는 것은 자유롭지 않았지만 쓸 수 있는 것만도 큰 선물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 가끔 찾아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고향 오하이오의 영스타운에 있는 아내 엘리자베스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았다. “가끔 협상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가 있어. 제발 그들이 조만간 성공적으로 협상을 끝낼 수 있었으면…. 당신은 내가 얼마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모를 거야. 그 외에 다른 건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아.”(1952년 2월 12일)

그리움과 함께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전했다. “협상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은데 기다리는 일이 나보다 당신이 더 힘들겠지? 당신은 아이들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사랑하고 애들한테도 아빠가 정말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전해줘요.”(1952년 6월 19일)

아내 엘리자베스도 남편에게 아이들의 안부와 사랑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아내가 보낸 답장은 대부분 ‘반송’을 뜻하는 손모양의 소인이 찍혀 되돌아왔지만 몇 통은 간혹 수용소에 갇혀 있는 대위의 손에 어렵사리 들어갔다. 그 편지는 그에게 삶의 원동력이었다.

“당신이 지난해 11월에 쓴 편지를 이제야 받았어. 어찌나 기쁘던지. 세 아이를 데리고 고생이 많을 텐데 새로운 집도 구하고 대견해.”(1953년 3월 3일)

매클레인 대위의 편지 쓰기는 정전협정과 함께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면서 끝이 났다. 그는 포로 교환의 막바지인 1953년 9월 5일 자유의 몸이 됐다. 포로가 된 지 34개월 만의 일이었다. “우리는 판문점에 도착했다. 그때의 기분이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꿈같았다.”(회고록 중)

그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되돌아가 가족과 상봉했다. 그를 반긴 건 가족뿐이 아니었다.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다 34개월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생환한 그는 이미 마을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가 판문점에서 미군에게 넘겨지는 장면과 고향에 돌아와 가족과 포옹을 하는 사진 및 기사가 고향 오하이오 영스타운의 지역신문인 ‘영스타운 빈디케이터’에 실렸다. 마을에 온 뒤에도 지역방송의 인터뷰 요청이 이어졌다. 미국 정부는 그에게 1955년 동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사용한 편지는 별도의 봉투 없이 접은 후 붙이면 봉인되는 형태의 것으로 편지 겉봉에는 ‘세계평화를 위한 전 중화인민공화국연합체’ 포로수용소에서 보낸 것으로 돼 있다. 봉투 오른쪽에는 테이프 자국이 있는데 이는 포로수용소에서 검열을 마친 표시다. ‘조선인민군 군사우편’ 소인과 함께 ‘미공군우편국’의 접수인(印)도 찍혀 있었다.

수십 년 전부터 6·25전쟁 관련 기록을 수집해 온 박 관장은 “매클레인 대위의 후손이 한 경매사이트에 내놓은 편지를 발견하고 후손에게 6·25전쟁 자료 수집가라고 설명한 뒤 어렵게 자료를 넘겨받았다”며 “한국을 위해 싸운 이국 병사의 고뇌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을 보면 평화가 왜 필요한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