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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에게 말 걸기 20선]두더지 고고학

입력 | 2009-07-08 03:04:00


◇ 두더지 고고학/임효재 지음/집문당

《“인류 전체의 99% 이상이나 되는 길고도 긴 역사 자료가 지하세계에 움츠리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그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의식이 없는 벙어리이자 현세 도피자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자가 이들을 찾아내어 그 진면목을 들추어내 줄 때에만 비로소 생명이 부활되어 역사적인 가치가 되살아나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런 것들을 찾아내어 밝히는 고고학이 발달되지 못하였을 때 역사는 항상 어둠 속에 묻혀있기 마련이다.”》

‘유물에 말 걸기’ 잊지못할 40년

1976년 봄, 서울대 고고학 연구실에는 흥분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경기 여주군 흔암리 청동기 유적의 집터에서 채집한 몇 가마니나 되는 흙을 조리질로 걸러내기를 6개월째. 흙 속에서 드디어 쌀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쌀이 아니라 3000년 전의 고대미였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 자료는 1세기경의 탄화미였다. 일본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쌀이 여러 차례 나와 한반도의 쌀이 일본에서 유입됐다는 설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흔암리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미는 한반도 벼농사의 역사를 앞당겼을 뿐 아니라 일본보다 약 600년 앞선 것으로 판정돼 동아시아의 벼농사 전파 경로를 바꿨다.

이때 사용된 기술을 ‘부유기술’이라고 한다. 미세한 크기의 탄화곡물을 찾아내기 위해 아주 가는 체로 흙을 걸러내는 기술이다. 1968년 미국 일리노이 주 노스웨스턴대의 수트르바 교수가 창안했다. 1976년 전까지는 한국에 도입되지 않았던 기술이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발견을 가져온 것이다.

당시 고대미 발견에 기여한 인물이 바로 이 책의 저자. 그는 1969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대 고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40여 년간 발굴현장을 누볐다. 이 노(老)교수는 자신이 평생 지켜온 현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1981년 시작된 강원 양양의 오산리 유적 발굴은 모래와의 싸움이었다. 오산리 유적이 호숫가의 모래언덕에 위치해 있는 데다 양양의 바람이 워낙 강해 아무리 모래를 퍼내도 다음 날이면 그만큼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발굴현장을 뒤덮곤 했다. 작업 중 부드러운 모래더미가 무너지면서 인부 한 명이 매몰됐다가 구출되는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바람 덕분에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는 ‘전화위복’이 생기기도 했다. 발굴 현장 주변의 모래가 깎여나가면서 그 속에서 점토로 만든 얼굴조각상이 발견된 것이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눌러 눈과 입을 표현한 이 조각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우였다. 이 외에도 각종 토기와 길이 24cm의 대형 돌톱, 돌을 깎아 만든 이음식 낚시도구, 지상가옥의 집터 등이 발굴됐다. 이 중 결합식 낚시도구는 다른 곳에서 발굴되지 않은 독특한 형태로 ‘오산리형 낚시도구’로 불린다. 이 유물과 똑같은 형태의 낚시도구가 1989년 일본 규슈 구마모토 현에서 발굴돼 고대 한국과 일본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증명하기도 했다.

저자가 대학 졸업 뒤 계속 고고학 연구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스승이었던 김원룡 박사는 저자에게 “이 학문은 지하에 묻혀 있는 옛 유물을 찾아 조상의 역사를 밝히는 것인 만큼, 부귀영화와는 담을 쌓은 채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고독한 연구의 연속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라고 물었다. 부귀영화 대신 말 못하는 과거의 유물에 목소리를 불어넣는 고고학자의 삶을 기꺼이 택한 저자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의 발굴현장에서 활약했던 경험과 각종 학술대회에 참가했던 감상 등을 이야기하며 “땅을 파는 두더지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라고 회상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