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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경제위기에 되돌아보는 ‘로멜 하우스’ 정신

입력 | 2009-02-09 02:59:00


1532년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오합지졸 168명을 거느리고 8만 명 군대를 가진 잉카제국 황제 아타왈파를 사로잡았다. 피사로의 군대는 강철로 만든 투구와 갑옷을 입고 쇠칼과 창으로 무장한 데 비해 잉카제국의 군대는 돌도끼와 나무 곤봉이 주 무기였다. 강철 무기와 석제(石製) 무기의 싸움에서 병사의 수는 의미가 없었다. 피사로는 황제를 가둔 감방을 황금으로 채워주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몸값을 받은 후 아타왈파를 처형했다. 남아메리카 잉카제국의 석기문명이 유럽의 철기문명에 무릎을 꿇은 인류사적 사건이다.

한반도에 철기문명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경이었다. 이때가 구(舊)철기시대라면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반은 이 땅에 신(新)철기시대 도래를 알린 순간이었다. 경북 포항시 포스코 박물관에는 그때의 감격을 말해주는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박물관 해설사 김은희 씨는 흑백사진을 가리키며 “36년 전 제철소 건설일꾼들이 용광로에서 황금빛 쇳물이 흘러나오자 일제히 두 팔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종합제철소 없이 빈곤한 농업국가에서 근대적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1965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철강공업지대 피츠버그 시를 둘러보고 돌아와 종합제철소 건설추진위원장에 박태준을 임명했다. 영일만 현장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66m²(20평)짜리 회색 목조건물이 들어섰다. 건설역군들은 이 건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영웅 로멜 장군의 야전군사령부 막사를 닮았다고 해서 ‘로멜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스코 박물관에는 ‘회사 재산 1호’ 로멜하우스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한강의 기적 이룬 新철기시대

박태준은 3년여 동안 사막전을 치르는 장군처럼 제철소 건설을 지휘했다. 공사 진척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부실공사를 찾아내면 책임자를 불러내 지휘봉으로 배를 찌르고 때로는 안전모를 내리쳤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씨는 대하소설 ‘한강’ 제7권에서 기자의 취재 형식을 빌려 박태준을 높이 평가했다. 조 씨는 “포항제철의 성공은 그분의 남다른 헌신성과 애국심이 이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포철이 생기면서 우리 경제의 방향이 중화학공업으로 바뀌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조 씨는 소설 속에 한국의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인물로 누구를 넣을지 고심하다가 박 씨를 선택했다. 박 대통령을 모델로 할 경우 독재와 장기집권 때문에 독자들의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한다.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이 고작 254달러였을 때였다. 정계 재계와 언론에서까지 ‘실패하고 말 부실기업을 또 하나 만드느니 철강을 수입해 쓰는 편이 낫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박 대통령은 착공부터 완공까지 13차례 포항을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열정과 집념이 한국 경제의 기적을 만들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1997년 외환위기를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극복한 것도 기업들의 수출 드라이브가 큰 힘이 됐다. 역사는 기업가정신이 침체에 빠진 경제를 보강하는 길임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수익을 창출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킨다. 미국 유잉 매리언 코프먼 재단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0%가 나라 경제의 건강이 기업가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응답했다.

우리는 세계가 찬양하는 기업가 정신의 모델을 여럿 갖고 있다. 뉴욕대 경제학과 윌리엄 이스털리 교수는 지금 같은 경제위기에는 정주영 같은 기업가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학업을 중단하고 철도공사판과 부두에서 노동자, 쌀 가게 배달부와 그리고 자동차 수리점을 했던 그의 경력을 소개했다.

박태준 정주영 이병철…

1938년 28세 청년 이병철은 대구의 허름한 목조건물에 삼성상회 간판을 내걸었다. 삼성상회는 청과 건어물 가게에서 무역 섬유 보험 전기 중공업 반도체로 사업영역을 넓히며 세계 일류기업 삼성전자를 만들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단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제철소 조선소와 반도체 공장을 세운 불굴의 기업가정신이다. 우리는 254달러에서 2만 달러까지 오는 데 28년이 걸렸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최빈국(最貧國) 대열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올라선 것이다. 세계가 놀라워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 앞에서 로멜하우스 정신을 생각해볼 때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