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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스물아홉 내 청춘,한물간 걸까요?

입력 | 2009-02-07 03:01:00


변호사 남편을 둔 엘리트 여성, 고용안정센터를 찾는데…

◇우울한 해즈빈/아사히나 아스카 지음·오유리 옮김/152쪽·9000원·랜덤하우스

‘해즈빈(has been)’이란 한창 때가 지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등을 뜻하는 단어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에 한 이름 날리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한물간 사람’이다.

도쿄대를 졸업하고 글로벌 기업에 입사했던 스물아홉의 엘리트 여성 리리코가 실직자가 돼 고용안정센터를 찾는다. 표면상으로 리리코가 회사를 관둔 이유는 결혼 때문이다.

이 결혼은 남들이 봤을 때 완벽에 가까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편 유스케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변호사인 데다 매년 결혼을 미루는 리리코에게 한결같이 구애해 온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시댁 근처에 잘 꾸며진 넓은 신혼 아파트는 시부모가 마련해 줬다. 리리코에게는 시어머니 레오코 씨가 자주 들러 이것저것 챙겨주려는 일이 다소 성가시다는 점 외에 불평거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해즈빈’이라고 여긴다.

리리코는 무엇 때문인지 꾸준히 ‘재취업 면접에 임하는 자기분석과 마음가짐’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이곳에 등록된 구인광고를 검색하며 일할 자리를 알아본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가지각색이다. 학창시절 유명했던 입시학원 ‘톱’의 손꼽히는 수재로 리리코에게 자극을 주었던 천재소년 구마자와는 불쾌한 웃음을 흘리며 과거의 친분을 빌미로 5000엔을 꿔가는 실직자가 돼 있다. 과거가 아무리 화려했든 그는 영락없이 ‘해즈빈’일 뿐이다.

24년간 다니던 제과회사에서 쫓겨난 늙은 영업사원은 리리코에게 젊은 시절 자신이 팔고 다녔던 ‘해바라기 초코’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아직도 ‘해바라기 초코’를 보면 그냥 지나쳐 버리지 못한다고, 100엔짜리 동전을 꺼내 사온 초콜릿을 입에 넣으면 가끔 눈물이 난다고, 이 초콜릿을 위해 나는 참 오래도록 애써 왔구나 싶다고.

소설은 중반부가 지나서야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언제든 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던 리리코의 말 못할 속사정을 드러낸다. 그는 사실 주변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회사를 관두게 됐기 때문이다. 학창시절부터 ‘시험공부가 체질적으로 맞는’ 모범생으로 승승장구하고 일류대에 입학했던 리리코는 도쿄대를 졸업한 뒤 미국계 컴퓨터 제조회사에 최우수 성적으로 입사해 단번에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실패란 것을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에게 부딪히고 깨져야 하는 사회생활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실수나 실패에 대한 강박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결과는 좌천에 좌천, 그리고 타의에 가까운 퇴직으로 이어지고 만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면 리리코는 이 결혼을 선택했을까. 리리코가 다시 찾고 싶은 것은 단지 ‘하이힐을 신고 마루노우치 일대를 누비는 커리어 우먼’이란 외피인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가 그토록 찾으려 애쓰는 것은 무엇일까. 리리코의 방황은 때론 자기중심적으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세대들의 소아적 감성과 철없는 우울증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런 나약함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