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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반 장학금, 믿는 곳에 맡깁니다”

입력 | 2008-06-23 02:57:00

27년 동안 모은 장학금 1억100만 원을 전액 동아꿈나무재단에 기탁한 경북 경산 ‘휴산장학회’ 최기호 설립자(왼쪽)와 장학금을 관리한 김판도 회장. 경산=이권효 기자


경산 휴산장학회, 동아꿈나무재단에 기금 1억100만원 전액 기탁

설립자 최기호씨, 지인들과 27년간 적립

300명에 5000만원 전달뒤 ‘비움의 결단’

“내 돈도, 장학회 돈도 아니지. 한 명이라도 인재를 키우는 데 보탬이 되면 그만이고….”

최기호(78) 씨는 경북 경산시 삼북동 주공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기자가 22일 찾아갔을 때 그는 좁은 거실에서 “동아꿈나무재단이 귀하게 써 줄 것으로 믿는다. 세상에 알릴 일도 아닌데…”라고 겸손해 했다.

최 씨는 경희대를 졸업하고 중고교 교사로 4년간 근무했다. 1960년부터 대구에서 20여 년 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퇴직할 무렵 사회에 뭘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장학금”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정관을 만들고 관공서에 등록한 정식 장학회는 아니었다. 틈틈이 결혼식 주례를 해주고 받은 사례금이나 명절이나 평소 인사를 오는 지인이 건네는 돈을 통장에 넣었다.

청소년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인들이 “이름이라도 하나 지어 놓자”고 해서 호(휴산·休山)를 딴 장학회를 만들었다. 1981년이었다.

“문안인사를 오는 사람들이 용돈을 주면 ‘그러지 말고 장학금에 보태 달라’고 하니 좋아들 합디다. 나야 그저 밥이나 굶지 않으면 되니까.”

이렇게 27년 동안 모은 장학금이 1억5000여만 원. 지인 150여 명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보태고 또 보탰다.

휴산장학회는 형편이 어려운 경산 지역의 중고교생 300여 명에게 5000여만 원을 전했다. 도움을 받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취업을 한 뒤에 장학금을 보탠 경우도 있다.

“장학금을 모으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집사람을 먼저 보내고 나도 따라갈 준비를 해야 하니 장학회도 믿을 수 있는 데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 씨는 농협 경산 중방동지점의 통장에 남아 있던 1억100만 원을 20일 동아꿈나무재단에 보냈다.

1985년 설립된 동아꿈나무재단에 장학회 기금을 전액 기탁한 경우는 처음이다. 그는 1999년과 올해 초에도 동아꿈나무재단에 210만 원을 전달했다.

“올해 2월 집사람이 먼저 갔어요. 죽기 하루 전에 장학금은 동아꿈나무재단에 맡기라고 하더군요. 다음 세대 걱정이 앞서기도 해서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최 씨는 아내의 장례식을 조용히 치렀다. 지인의 경조사 때마다 부조금을 꼬박꼬박 냈지만 정작 자신은 받지 않았다. 아내의 시신은 대학병원에 기증했다. 자신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950년대에 신석정 시인에게서 시를 배운 뒤 1978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건강이 나빠진 지금도 시작(詩作) 노트는 방 한쪽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펴낸 시집이 28권에 이른다. ‘광화문 거리에 서서’(1984년)가 대표적이다.

그는 여전히 신문기자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새벽에 배달되는 동아일보를 꼼꼼하게 읽고 기사가 문제 있다고 생각되면 전화를 걸어 논쟁을 벌인다.

최근 펴낸 ‘까치밥’이라는 시집에서 그는 ‘단돈 1원도 나랏돈이다/백성들 부담을 덜어주는/그런 정부가 나와야 한다/나라도 주식회사만 같아/적자면 사람 갈아야 한다’고 썼다.

장학금 통장을 관리한 휴산장학회 김판도(67·전 경산여고 교감) 회장은 “선생님이 꼿꼿한 모습을 잠시도 잃지 않아 존경해 왔다. 기금을 보탠 사람 중 10여 명은 고인이 됐는데, 동아꿈나무재단에 기탁한 것을 알면 기뻐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경산=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