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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생 40년…고희에 시집-장편소설 나란히 펴낸 한승원 씨

입력 | 2008-06-19 02:56:00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꽃 한승원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피어나는 것이 아니고/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 시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나는/칠보 장식한 비천녀의 공후인/시나위 가락으로 출렁거리는 혼령입니다./별똥 떨어진 숲까지 다리 놓는 무지개로/쨍쨍 갠 날의 음음한 콧소리 합창으로/원시의 늪지대 달려가는 암컷 사슴의 숨결로/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다/시 같은 웃음을 까르르까르르 알처럼 낳는 것입니다./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달거리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것입니다./이상(李箱)처럼 객혈하는 것입니다.》

태양은 변치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해는 뜨고 지고 세월도 가고 온다. 같은 하루면서 새로운 하루. 그렇게 쌓인 시간이 40년, 70년이 됐다.

고희(古稀)에 맞은 등단 40주년. 한승원(사진) 작가는 “별다른 감회는 없다”는 말로 감회의 변을 대신했다. “글에 미쳐 글 쓰며 즐거웠소. 글을 쓰는 한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글을 씁니다.” 평생 미친 행복 그리고 고뇌. ‘등단 불혹(不惑)’에 작가는 시집 ‘달 긷는 집’(문학과지성사)과 장편소설 ‘다산’(랜덤하우스)을 동시에 펴냈다.

○ 시는 순수한 맨살의 고백

“시집은 한 달쯤 먼저 낼 생각이었소. 40년이라고 별게 있나. 시는 시로, 소설은 소설로 있는 그대로 봐주길 원했지. 해산토굴(작가의 작업실)에 자리한 지도 13년째요. 성가신 손님 없고, 홀로 꿈꾸며 사는 ‘프리미엄’이 있습디다. 그 결과물이 나온 것뿐이라오.”

그가 서울 생활을 접고 전남 장흥군 율산마을의 이 작업실에 칩거 중인 건 알려진 일. “책 읽고 글 쓰느라 적적할 새도 없었다”지만 어찌 행복하기만 했을까. 그런 그에게 시는 번민의 간극을 메우는 ‘기댈 곳’이었다.

“시는 가장 진솔한 자기표현이오. 의상을 걸치지 않은 맨살이지. 몸이 아프거나, 불면의 밤을 지새우거나, 소설이 안 써질 때 시를 씁니다. 아니, 쓰는 게 아니라 솔직하게 ‘써집디다’. 알아서 피어나는 야생화 같다고나 할까. 스님들 사리처럼 그냥 시가 만들어집니다.”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1999년) 이후 오랜만에 낸 시집은 그런 작가의 심경이 고스란하다. 쑥국화 족두리꽃 치자꽃 등 17편의 연작시 ‘꽃’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문학평론가 김춘식 씨는 이를 두고 “꽃의 영혼과 시적 영혼의 동일시”라 평했다.

○ 소설로 정약용이란 거봉을 오르다

작가로서 그가 풀어야 했던 숙제는 ‘다산’이었다. 해산토굴로 내려온 것도 정약용을 깨치리라는 목표 때문이었다. 기나긴 유배생활에서 불멸의 작품들을 남긴 다산처럼 그도 스스로를 가뒀다.

“정약용을 쓰리라 마음먹은 건 30년쯤 됩니다. 하나 다산이 어디 그리 쉽게 오를 산인가. 공부하고 또 공부했지. 사서삼경부터 다시 시작해서 다산 전집을 모두 탐독했어요. 여전히 확실히 읽어냈다는 자신은 없소. 하지만 치열하게 읽고 썼습니다.”

그의 최근 작품만 봐도 이런 경향이 읽힌다. 다산의 제자 초의 스님을 다룬 ‘초의’(2003년), 다산의 형 정약전에 대한 ‘흑산도 하늘 길’(2005년), 그리고 다산의 후학이자 벗 김정희에 관한 ‘추사’(2007년)까지. 다산을 향해 작가는 한발 한발 걸어갔다.

긴 여정은 무엇을 남겼을까. 그는 이를 ‘사업(事業)’, 두 글자로 요약했다.

“그저 돈이나 버는 게 아닙니다. 주역을 보면 ‘성인의 뜻에 따라 곤궁한 백성을 배불리는 일’을 사업이라 했소. 정약용의 뜻도 그러했지. 의로움과 올바름을 바탕으로 만인이 살기 좋게 구제하는 걸 선비의 사업이라 봤습니다. 요즘 실용주의, 실용주의 하는데 다산 관점에서 보면 한참 천박한 것이지요. 진정한 실사구시는 청렴과 결백, 정직이 근본입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