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문학예술]잃어버린 것을 떠나보내기까지…‘꽃피는 고래’

입력 | 2008-06-14 03:00:00

12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소설가 김형경 씨. 그는 “소설을 쓰는 동안 그 정서를 유지하려고 외출도 삼갔다”면서 “힘들지만 삶에서 너무나 소중하고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 꽃피는 고래/김형경 지음/272쪽·9800원·창비

‘그런데 할아버지, 고래가 꽃을 피운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그건 말이다…. (포경선에게서) 급소를 맞은 고래는 죽기 전에 마지막 숨을 내뿜는데, 그 숨에는 피가 뿜어져 나온다. 핏빛 물 뿜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온 바다 가득 퍼진다. 그걸 꽃핀다 한다.’(103쪽)

슬픔은 그렇게 꽃이 핀다. 열일곱 살. 니은은 여전히 아빠의 노래가 마뜩잖다.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도대체 어떤 숨결에서 신화를 마주할까. 아직 그 꽃망울 맺기 전에. 성한 답 듣기 전에. 엄마 아빠는 그렇게 니은 곁을 떠나갔다.

12일 작가를 만난 자리에서 그것부터 물었다. 고래의 숨, 신화의 숨.

“그건 여전히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소설가의 사족보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신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주목해 보세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매개로서 신화나 상징의 존재를 떠올리는 게 중요합니다.”

니은에게도 그랬다. 고래는 잃어버린 부모의 존재를 붙잡는 고리였다. 아프지만 놓을 수 없는, 아니 놓는 방법을 모르는. 갑작스러운 상처는 돌고 돌며 ‘뱃속에서는 여전히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서울을 떠나 아빠의 고향 처용포로 간 건 고아의 본능일지도.

“열일곱은 어려운 나이예요. 주민등록증이 나오는 어른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세상을 대할 줄 모르는 때죠. 그 나이에 어마어마한 상실을 겪는다면? 어쩔 수 없이, 예전의 정체성과 결별하고 새로운 맺음을 마주해야 하죠. 일종의 성장소설일 수도 있어요. 공간이든 시간이든 어딘가로 나아가는 게 문학 본연의 기능이라면 모든 문학은 성장소설이니까.”

다행히 처용포는 외롭지 않았다. 한때 포경선을 끌었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고래 고기를 파는 왕고래집 할머니. 그들은 고래로, 아빠 엄마로, 항구의 짠 내로 니은을 감싸 안았다. 상처는 낫는 게 아니라 떠나보내는 것임을, 아픔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임을. 니은은 찬찬히, 그리고 한 겹씩 배워간다.

“처음 고래를 모티브로 했던 건 환경을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10년 전 처음 구상하고 취재할 때만 해도 처용포의 배경이 된 울산 장생포는 딱 맞는 배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다듬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이 버무려졌죠. 소설 속의 상실과 애도는 다면적인 프리즘입니다. 고래, 환경, 이별, 어린 시절…. 인생도 원래 여러 것을 함께 떠나보내잖아요.”

소설은 내내 슬프다. 한 땀씩 짜 내려갈 때마다 슬픔이 손가락을 콕콕 찌른다. 쭈그러들다 딱딱해지다 쿵쾅거리다, 가슴팍과 심장 사이쯤에 생채기를 낸다.

“다음에 나올 에세이까지 치면 내면을 파고든 작품이 소설 3편, 에세이 3편이 됩니다. 이제 그만 하려고요, 호호. 다음 소설은 조선시대 선비가 주인공이 될 겁니다. 요즘 너무 전문화 분업화만 외치는 세상이 됐다는 생각 안 드세요? 우주와 대지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보는 사람을 만나고 싶거든요. 그 전에 니은을 떠나보내야 하니…, 훌쩍 여행부터 가야겠네요.”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