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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 과도기]강한 미국의 부활-레이건 前 대통령

입력 | 2008-06-03 02:55:00


“위대한 커뮤니케이터” 국민신뢰 업고 개혁 박차

취임 첫해부터 인플레-실업률 고공행진

‘대선 우군’ 관제사 노조 파업까지 겹쳐

‘일관성-원칙의 리더십’ 위기돌파 원동력

‘레이거노믹스’ 통해 성공한 대통령으로

《“우린 백악관에 친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우리에게 ‘평생 재취업 금지’란 강경책을 내놓았다. 살인범도 사면을 해주는데….” 전직 항공 관제사인 론 테일러(60) 씨가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초기인 1981년 8월 ‘전문직 항공관제사 노조(PATCO)’ 간부로 파업을 이끌었던 테일러 씨는 당시 해고된 뒤 전기 공사 등을 하며 살아왔다. 그는 지금도 관제사 복직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레이건이 설마 그렇게 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는 그의 말에는 배신감이 깊게 깔려 있다. 하지만 같은 사안에 대해 상당수 일반 미국인은 “레이건이 그렇게 일관성 있게 원칙을 지킬 줄은 몰랐다”(교포 1.5세 제임스 영 박 씨)고 평가한다.

많은 미국인이 역대 최고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취임 초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1980년 대선에서 50개 주 가운데 44개 주에서 승리하고 총득표수 50.7% 대 41%라는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지만, 그가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물려받은 것은 인플레율 11.83%, 실업률 7.5%의 악화된 경제와 이란 인질 사태로 대표되는 구겨진 미국의 자존심이었다.

더구나 미국 역사상 최고령으로 취임한 70세의 대통령은 취임 40여 일 만에 암살미수범의 총격을 받아 쓰러졌다. 하지만 폐에 박힌 총탄보다 더 큰 첫 도전은 공공부문에서 왔다.

그는 직접 쓴 취임 연설에서 “지금의 정부는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아니다. 바로 문제 그 자체”라며 공공부문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방정부 소속 1만7000여 관제사의 조직인 PATCO는 1년여 동안 끌어온 협상이 결렬되자 8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PATCO의 요구사항은 임금 총액 1만 달러 인상, 주 32시간 근로(기존 40시간), 퇴직 후 복지대책 등이었다. 당시 관제사들의 평균 연봉은 2만462∼4만9229달러. 총액 1만 달러 일괄 인상은 거의 연봉의 50%를 올려 달라는 요구였다.

관제사들이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인력이며 근무강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는 점을 감안해도 합리적 요구수준을 벗어났다는 게 연방정부의 판단이었다. 더구나 줄줄이 다른 공공부문의 협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8월은 경제난 속에서 적자를 면치 못하는 항공업계가 그나마 적자를 보전하는 휴가철 성수기. 이런 때에 비행기 운항이 멈출 경우 경기에 미칠 타격과 시민 불편은 감내하기 힘든 수준일 것이라고 관제사 노조는 판단한 것이다.

노조가 기대하는 또 하나의 유리한 조건은 레이건 대통령이 등을 돌리지 못할 것이란 기대였다.

“미국의 항공관제 시스템은 국민안전에 직결되는 분야임에도 너무 적은 인력이, 비합리적으로 긴 노동시간과 낡은 장비를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관제사들이 현대식 장비와 충분한 인력, 합리적 노동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후보 시절 PATCO에 보낸 서한의 일부다. PATCO는 전통적으로 ‘노조=민주당 지지’란 공식을 깨고 공화당인 레이건 후보를 공식 지지했다.

노조는 8월 3일 파업에 돌입했다. 노조원 1만7000명 가운데 1만3000여 명이 참여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반응은 강경했다. 그는 “48시간 내에 복귀하지 않으면 관련법에 따라 전원 해고할 것이며, 평생 연방정부에 재취업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연방 공무원의 파업을 금지한 법률에 근거한 것이었다. 1955년 제정돼 1971년 대법원의 합헌판결을 받은 이 법률은 파업 시 1년 이하의 징역형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동안 22건의 연방공무원 파업이 묵인돼 왔다.

이번에도 엄포에 그칠 것이라는 게 노조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틀이 지난 5일 대통령은 관제사 1만1345명을 해고했다.

항공기 운항은 평상시의 80% 수준에서 이뤄졌다. 정부는 군인과 은퇴한 관제사들을 동원하고 자가용 비행기 등 불요불급한 운항을 중단시킴으로써 공항 운영을 계속해갔다.

파업은 결국 노조의 참패로 끝났고 PATCO는 이듬해 10월 노조 자격을 잃었다.

평생 재취업 금지 명령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6년에야 폐지됐다. 일부는 복직했지만 수천 명은 영영 재취업하지 못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관제사 노조의 파업 위기를 정면 돌파한 이래 ‘레이거노믹스’라 불리는 공급 중시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미국 노동운동사에선 ‘내리막 쇠퇴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된 뼈아픈 패배’(조지타운대 조지프 매카틴 교수의 평가)였다.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 8년은 그 후에도 레바논과 그레나다 사태, 리비아 폭격, 이란-콘트라 스캔들, 소련과의 군비경쟁 등 숱한 위기와 난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그가 위기를 돌파한 원동력은 소신과 일관성, 용기에 대한 국민의 신뢰였다. 그리고 그런 신뢰를 가능하게 한 힘은 ‘위대한 커뮤니케이터’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소통력이었다.

사안의 핵심을 알기 쉽게 국민의 눈높이에서 세련되게 전달하는 능력, 그리고 친근감을 더해주는 탁월한 유머 감각이 ‘골수 강경파 냉전주의자’ ‘카우보이’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압도했다.

암살미수범의 총격을 받고 조지워싱턴대 병원에 실려 간 레이건 대통령이 수술대에서 의사들에게 한 유머는 너무도 유명하다.

“당신들이 공화당원이기를 바랍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민주-공화 정치적 이유로는

개혁추진 대통령 안 흔들어

■ 美 정권교체 초기 개혁 저항은

연방국가제도(Federation System) 아래 공화당과 민주당의 권력 균점이 보편화된 미국에서는 4년마다 돌아오는 대통령선거에서 선출된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대 정당은 단일한 게임의 법칙 안에서 경쟁하는 두 개의 스포츠 팀에 비유되며 아무리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더라도, 설혹 심판관의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경쟁에서 패배한 팀은 승리한 팀을 인정하는 전통이 200년 이상 굳어져 왔다.

하지만 ‘개혁’을 부르짖는 정권의 시도가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힌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3년 빌 클린턴 행정부 초기 당시 대통령부인이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의 의료보험제도 개혁 무산.

그는 ‘의료보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의욕적으로 개혁안을 마련했으나 보험업계와 의사협회의 집요한 로비와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은 좌절됐다. 그 여파로 민주당은 이듬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상하 양원을 내주는 수모까지 겪었다.

재임 중 매우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이 속한 민주당 의원들의 저항에 부딪힌 사례로 기록된다.

‘도덕정치’를 슬로건으로 당선한 카터 대통령은 의회의 선심성 예산 배정 요구에 잦은 비토권을 행사해 민주당 의회 지도부와 마찰을 빚었고 의회는 소비자 보호법률 개정안 등 카터 행정부의 개혁 법안을 모두 거부했다.

정부의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국내적으로 심각한 분열을 초래한 경우도 있다.

1968년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은 베트남 철군 문제로 사회적 분열 양상이 극심해지면서 그해 대선에서 결국 베트남 철군을 공약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 역시 반전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격화된 사회 혼란을 극복하지 못했고 진보세력의 저항에 시달렸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60년 대선에서 북부를 대표하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당선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필두로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 등이 잇따라 연방에서 분리하겠다고 선언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