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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씨 에세이 ‘아아, 남대문’ 발표

입력 | 2008-02-28 02:55:00

소설가 박완서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전쟁통 소녀마음 다독여줬던 숭례문

민족에게 꿈을 주는게 문화의 힘인데…”

“당시만 해도 남대문(숭례문) 주위에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 남대문 홀로 크고 장엄했다. 그렇다고 위압적인 건 아니었다. 대도시의 혼잡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조그만 계집애에게 괜찮다, 괜찮아라고 다독거릴 듯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소설가 박완서(77) 씨는 숭례문을 처음 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당시의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박 씨는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 3월호에 ‘아아, 남대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싣고 숭례문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면서 불타버린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했다. 박 씨는 “남대문의 문패는 남대문이 아니라 숭례문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다”고 밝혔지만 글에선 ‘남대문’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개성을 떠나 서울역에 처음 도착하던 날 대도시의 모습에 극도의 혼란을 느꼈을 때 남대문 덕분에 위안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남대문의 석축은 어린 손자들을 치마폭에 감싸주는 증조할머니처럼 부드럽고 여성스러웠다. 남대문 덕분에 저 문 안의 도성이 살 만한 데가 될 것 같은 안도감이 왔다.”

그는 그 후로는 남대문 곁을 지나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1974년 쓴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 그는 남대문을 등장시켰다.

소설의 주인공은 6·25전쟁으로 서울을 떠나면서 ‘마지막 돌아보는 셈 치고’ 뒤를 돌아본다. 그의 시야에 ‘의연히 서 있는’ 남대문이 들어온다.

주인공은 “눈발을 통해 본 남대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을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나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으로 예배하듯이 남대문을 우러르고 돌아서서 남으로 걸었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져 있던 주인공은 남대문을 본 뒤로는 “이상하게도 훨씬 덜 절망스러웠다”고 밝힌다.

박 씨는 글에서 문화와 문화재의 소중함에 대해 한마디 한다.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덜 절망스럽게 하고 희망과 꿈을 갖게 하는 거야말로 바로 문화라는 것의 힘일 터이다. 그건 또한 문화 민족이라면 문화재가 있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가 그걸 공유한 민족에게 이러한 영감을 주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걸리게 돼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