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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서영아]‘후쿠다 총리’ 만만한 상대 아니다

입력 | 2007-09-20 03:00:00


“어쩌면 앞으로 ‘2007년 체제’라는 용어가 생겨날지도 몰라요.”

일본 자민당이 7월 29일 참의원 선거에서 ‘역사적 참패’를 기록한 뒤 사석에서 만난 한 일본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를 뜻하는 용어 ‘55년 체제’를 빗대서 한 말이다.

여소야대로 바뀐 참의원을 중심으로 정치권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 일본도 여야당이 정권을 주고받는 시대로 돌입할 수 있다는, 일종의 기대가 섞인 분석이었다.

자민당은 야당 연립정권이 집권한 1993년 8월부터 10개월간을 제외하고는 1955년 이래 ‘만년 여당’으로 집권해 왔다. 이런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데는 당내에서 파벌 간에 ‘시계추의 원리’에 따라 정권을 교체하는 구조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1974년 금권정치로 물러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의 후임은 ‘클린’ 이미지의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였고 2001년 자민당 정치의 표본 같던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의 후임은 “자민당을 깨부수겠다”고 외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였다.

1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돌연한 사의 표명에 따라 진행 중인 자민당 총재 선거전은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장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확인한 듯한 양상이다.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작은 눈 덩어리가 순식간에 거대한 눈사태로 변하듯, 자민당의 거의 모든 파벌이 ‘후쿠다 지지’를 결의하는 데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아소 간사장의 말대로 ‘막이 오르니 연극은 끝나 있었다’.

이 같은 ‘나다레(雪崩·눈사태)’ 현상은 지난해 총재 선거에서 아베 총리를 옹립할 때도 나타났다. 그런데 같은 자민당 의원들이 불과 1년 만에 온건 현실주의 노선인 후쿠다 후보에게 몰린 것이다.

별로 아름답지 않은 현상이지만, 여기에도 자민당의 전통적 생존원리인 ‘시계추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베 총리와 차별화된 정치인으로 자민당의 얼굴을 교체하지 않고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일본정치 전문가인 제럴드 커티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자민당에 아직 생존본능이 남아 있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이변이 없는 한 후쿠다 후보는 25일 국회에서 차기 총리로 지명되겠지만 그의 앞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조기에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요구는 새 총리에게도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후쿠다 후보가 아시아 중시 노선을 갖고 있고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반대한다’는 점에 기대를 거는 듯하다. 실제로 그가 총리가 되면 일본의 대외정책에는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대북관계는 납치에 연연해 스스로의 발목을 묶었던 아베 정권과는 확실히 달라질 듯하다.

그렇다고 한일 관계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으로 생각된다. 후쿠다 후보 역시 보수파로 철저히 일본의 국익에 입각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관방장관 시절에는 유사법제 정비를 주도했고 미사일방어시스템 도입을 결정했다. 그가 말하는 ‘아시아 중시’ 노선도 철저히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다.

오히려 고수(高手)를 만난 한국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적어도 당분간 일본은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독도 해역 조사 같은 ‘유치한’ 문제로 도발해 오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때일수록 대일관계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은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장기적으로는 이웃 나라 일본에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할지도 주시해야 함은 물론이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