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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히로시마 나가사키와 ‘역사의 망각’

입력 | 2007-08-09 03:02:00


오늘 8월 9일은 1945년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날이다. 올해엔 이 나가사키 출신의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일본 방위상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고 머리를 가다듬는 지금 (원폭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장관직을 사임하는 물의가 일었다. 7월 초의 일이다. 그러면서 맞는 ‘원폭의 날’이라 일본의 주요 언론은 새삼스레 일본 국내외에서 논의되는 원폭 투하 ‘용인’의 문제를 들고 나와 눈길을 끈다.

대부분은 규마 전 장관의 발언이 역사를 망각하고 미국의 원폭 정당화를 추종한다는 비난이다. 미국인은 원폭 투하로 전쟁이 끝나 100만 명의 미군이 구조됐다고 믿고 있으며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은 일본이 피해자인 척하는 부당한 주장을 드디어 거두고 ‘정의의 폭탄’ 투하를 뒤늦게나마 인정한 것으로 규마 전 장관의 발언을 이해한다는 논평도 있었다.

두 세대가 지난 옛일이니 ‘역사의 망각’은 자연 필연의 현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의 미미한 기억도 역사의 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조그마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성 잃은 일본의 對美결전

우선 가까운 얘기부터 하자. 일본에서 원폭 투하를 ‘용인’한 것은 규마 전 장관의 발언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81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36주년을 맞아 다케미 다로(武見太郞) 전 일본의사회 회장은 미국의사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원폭 투하가 항복을 재촉해서 결과적으로 일본을 구했다는, 그때까지 어떤 일본인도 감히 공언하지 않던 사실을 밝혔다. 주목해야 할 점은 다케미 전 회장이 원폭 투하에 의한 전쟁의 조기 종결이 (일본의 양심적인 인사조차 그렇게 믿고 있는) 100만 명의 미군만을 구조한 것이 아니라 ‘이치오쿠소오교쿠사이(一億總玉碎·일억총옥쇄)’의 결의로 수백 수천만 명이 희생될 무모한 전쟁을 계속하려는 ‘일본을 구했다’는 것을 지적한 점이다.

요즈음 사람에겐 낯선 말일 수도 있는 ‘교쿠사이(옥쇄)’란 말은 우리가 국민학교 5, 6학년 시절(1944∼45년)엔 ‘가미카제(神風)’란 말과 함께 자주 듣던 일제 말기의 신조어였다. 패색이 완연한 일본군이 태평양의 섬을 미군의 반격으로 빼앗길 때마다 ‘용맹무쌍’한 일본군은 구차하게 포로가 되지 않고 구슬이 부서져 가루가 되듯 모든 장병이 장려하게 죽음을 택한다는 것. ‘교쿠사이’한다는 말은 곧 ‘전멸’한다는 뜻이었다.

1943년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일본군 2만4000명이 ‘교쿠사이’한 것을 시작으로 알류산 열도의 아투 섬에서 2500명이 ‘교쿠사이’했다. 다음 해엔 사이판 섬에서도, 괌 섬에서도 ‘교쿠사이’했다. 일본 영토인 이오(硫黃) 섬에 미군이 상륙했을 때엔 2만3000명이 ‘교쿠사이’했고 오키나와 섬 전투 때엔 일본 군인과 도민의용군 9만 명, 그리고 비전투원 10만 명이 ‘교쿠사이’했다.

오키나와의 참극이 있었던 1945년 4월엔 유럽에서 동맹국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살해되고 독일의 히틀러가 자살, 5월에는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다. 그러나 일본은 6월 8일 천황(天皇) 임석하의 최고 전쟁지도자회의에서 ‘본토결전(本土決戰)’ 방침을 채택했다. 그에 따라 본토 사수를 위한 병력을 59개 사단으로 확충하고 ‘국민의용군’을 편성해서 미군이 상륙하면 인해전술로 적을 바다로 내쫓기로 하고 그를 위해 우리들 국민학교 아동도 허수아비를 죽창으로 찌르는 연습을 했다.

7월에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다. 일본 정부는 그를 ‘묵살’하기로 하였으나 8월에 원폭이 투하되자 수락하기로 결정, 8월 15일 ‘덴노’의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이 공식화됐다. 군부 일각에선 8월 10일경부터 철저항전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실패한다.

‘원폭 불가피론’도 역사의 진실

원폭 투하는 그에 희생된 20만 명의 고귀한 인명의 몇 배가 되는 미군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십 배의 일본인을 구했다는 점이 망각해선 안 될 역사의 진실이다. 원폭이 죽인 것은 한국인 2만 명을 포함한 희생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일본의 침략전쟁을 뉘우치는 양심과 염치심은 아닐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