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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형 CEO의 빈자리, 머슴형 CEO 채운다

입력 | 2007-05-07 20:16:00


"최고경영자(CEO)의 비전 제시 능력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실행력 없는 비전은 단지 허상일 뿐입니다."(마크 허드 휼렛패커드 회장)

"좋은 경영은 '기업 시민의식(Corporate Citizenship)'에서 출발합니다"(짐 맥너니 보잉 회장)

"CEO는 권력 공유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마틴 설리번 AIG 회장)

사회가 요구하는 CEO상이 변하고 있다. 경영 전반에서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며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던 CEO들이 사라진 자리에 실리 추구형 경영자들이 떠오른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지루한 CEO'가 뜬다=새로 등장하는 CEO들은 거창한 경영 구호보다는 구체적인 실행력에 중점을 두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는다. 또 이사회와 견제보다는 협력 관계를 모색하고 정부, 노조, 환경단체 등 외부세력과 갈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도 열심이다.

엑센추어 컨설팅의 월트 쉴 이사는 "카리스마 넘치던 리더의 시대에서 '지루한 CEO(boring CEO)'가 각광받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고 평했다.

칼리 피오리나 전 휼렛패커드 회장, 모리스 그린버그 전 AIG 회장, 마이클 아이즈너 월트디즈니 전 회장은 얼마 전까지 미국 경영계에서 가장 존경받던 CEO였다. 내부적으로는 이사회를 무력화시킬 정도로 절대적인 경영권을 확보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대중을 휘어잡는 친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2005~2006년을 기점으로 이 같은 카리스마형 CEO는 대거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기간동안 20~30개 초대형 기업 CEO들이 임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쫓겨났다. WSJ은 이런 변화를 "구질서(old order)의 종말"이라고 평하며 "1930년대 이후 이처럼 근본적인 CEO 물갈이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이사회의 반란=새로운 유형의 CEO 등장은 이사회 역할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05년 부실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이 이사회에도 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이사회는 CEO의 실적부진과 부정행위에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경영진을 배석시키지 않은 사외이사 회의가 정례화된 것도 원인이다.

피오리나 전 회장과 그린버그 전 회장은 이사회로부터 "회사가 경영부진에 휩싸였는데 대외활동에만 주력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해고 통보를 받았다.

휴렛패커드, 보잉, AIG, 월트디즈니는 새로운 CEO가 부임하면서 실적과 평판이 좋아졌다. 이사회, 특히 사외이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실적 우선 경영이 자리 잡고 환경, 노동 단체와의 관계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린버그 회장 시절 회계부정 스캔들을 겪은 AIG는 2005년 설리번 회장 부임 후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대사를 영입해 환경문제를 다루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액센추어 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2005년 이후 28개 대기업 CEO들은 전략이나 비전 수립보다 구체적인 운영 실행 문제에 더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