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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만화가의 길

입력 | 2007-02-22 03:00:00


‘아톰’이 나오기까지

《만화를 그리는 것도 죄가 되던 시절, 나는 애써 그린 만화를 들키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매일 아침 화장실 안쪽 벽에 그림을 바꿔 붙였다.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쳐다볼 수밖에 없는 정확한 위치에 말이다.》

일본의 효고 현 다카라즈카에는 전철회사 한큐가 경영하는 곤충관이 있다. 곤충관 진열실의 오사무시(딱정벌레) 표본 책장에는 견학 온 학생들이 해 놓은 낙서가 있는데 거기에는 ‘데즈카’라고 적혀 있었다. 데즈카는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를 말하고, 벌레라는 뜻의 무시는 데즈카의 필명이었다. 일본에서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데즈카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데즈카는 무시라는 필명을 지은 배경을 설명하면서 밤만 되면 이상하게 활기가 넘쳐서 네온 불빛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오사무시가 만화가와 정말 비슷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꿈이라는 불빛을 찾아 날아갔던 만화가 데즈카. 그의 자서전 ‘만화가의 길’은 만화를 벗 삼아 열정적이며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데즈카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그가 1989년 2월 9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추억이나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만화가다운 필체로 풀어낸다.

데즈카는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대 의학부 2학년 시절 ‘마이니치소학생신문’에 네 컷짜리 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 데뷔했다.

그는 만화를 통해 당시 전쟁의 폐허 속에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어 했다. 그는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웃음이 되는 것. 이것이 만화가의 길”이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 발레, 무대, 영화, 천체, 곤충, 역사, 여행 등에 조예가 깊었지만 무엇보다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다. 이러한 열정이 데즈카의 창작에 집약되어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을 했다고 그의 매니저는 회상한다.

책 속에는 그가 그렸던 ‘신보물섬’, ‘읽어버린 세계’, ‘메트로폴리스’, ‘리본의 기사’, ‘정글 대제’, ‘철완 아톰’ 등에 대한 숨은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2001년 오디세이’의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과의 인연, 미국 애니메이션의 왕 디즈니를 만났던 사연 등도 소개된다.

‘만화가의 길’을 읽는 또 다른 재미는 데즈카가 살았던 1950년대 일본의 사회상을 읽는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도전이 펼쳐지고 미국의 점령 속에서 가졌던 비참한 기억들은 고스란히 데즈카의 만화 속으로 스며든다. 지구인과 우주인의 알력 싸움, 이민족 사이의 분쟁, 인간과 동물 사이의 오해, 로봇과 인간의 비극 등은 그의 대표작 아톰의 테마를 형성한다.

책 제목처럼 이 자서전은 데즈카가 만화가로서 꿈꾸고 걸었던 하나의 길을 예시해 준다. 데즈카는 의학박사, 문필가, 프로듀서, 영화감독 등 다양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어디에 글을 쓰든지 자신의 직업을 만화가라고 서슴없이 밝혔다고 한다.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가를 지망하는 학생은 물론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이루어 가는 기쁨과 사명감을 일깨워줄 만한 책이다.

이동훈 장난감박물관 토이키노 기획이사